‘一切皆空’, 모든 것은 윤회하며 변화하며 진화한다
어느 때나 있어왔던 갈등의 치유방법-‘인간은 원래 선하다’는 인식의 전염‘一切皆空’, 모든 것은 윤회하며 변화하며 진화한다
대통령 탄핵과 체포 관련 찬반 시위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각종 미디어와 SNS에서는 대립되는 갈등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목회데이터연구소는 최근 사회 전반에 긴장과 불신을 확산시키는 이러한 갈등의 해소가 시급하다며 2025년의 첫 번째 이슈로 ‘한국인의 공공갈등 의식’을 다뤘다. 이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대다수인 90%가 우리 사회의 전반적 갈등 수준을 ‘심각하다(매우+약간)’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3명 중 2명(67%)이 우리 사회의 갈등은 ‘작은 불씨에도 순식간에 폭발할 정도로 위험 수위가 높다’고 했다. 미국의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가 17개국 대상으로 사회적 갈등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결과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사회 갈등 지수가 가장 높은 국가로 나타났다고도 부연했다.
대통령 체포를 두고 벌이는 치졸한 대치에서 일촉즉발의 상황을 보는 듯 하다. 대립 당사자들은 치졸함 아닌 정의와 법치를 내세우고 사생결단으도 덤벼드니 폭발성을 더해준다.
그러나 이번 사태 뿐 아니라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갈등과 대치는 있어 왔으며 언론들은 마치 폭발 위험처럼 호들감을 떨어 대립자들을 흥분하게 만든다. 세월 지나면 언론들은 또 다른 자극과 흥미를 주는 이슈로 자연스럽게 옮겨가며, 대립 당사자들도 언제 그랬던가 싶게 능청스런 일상으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그리고 또 다른 갈등 폭발 위험을 조성해 나간다. 언론과 사회의 속성이다.
한국리서치 ‘여론속의여론’ 조사에 띠르면 현재 우리 국민은 ‘여당과 야당’(70%), ‘진보와 보수’(64%) 등 정치/이념과 관련한 갈등을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집단간 갈등 유형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옮겨 다닌다. 최근 영향력 있는 이슈는 여야, 보혁의 갈등이지만 빈부, 영호남, 노사, 정규·비정규, 수도권과 지방, 세대간, 남녀 등 집단별 갈등인식은 여전히 도사리고 있으며 언론과 사회는 적절하게 이들을 ‘폭발 위기’라며 부각시킬 것이다. 세력다툼으로 이익을 얻는 권력의 속성도 이러한 갈등들을 부추기는데 큰 역할을 한다.
위에 거론한 갖가지 국내의 집단 갈등 외에 역사 이래 국제적으로 계속되고 있는 집단갈등으로 종교를 빼놓을 수 없다. 종교 갈등에도 항상 권력과 세력의 다툼이 관여했다.
중세 유럽 기독교 국가들이 이슬람교도들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벌인 십자군전쟁(1096-1291)은 8차례 200년에 걸쳐 벌어졌다. 그리고 그 갈등과 적대감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촉발된 16-17세기의 유럽 종교전쟁은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충돌로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잉글랜드에서 치열하게 전쟁을 했다.
현대 들어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현대 종교 갈등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고대에서부터 시작된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에 대한 소유권 다툼이 0세기 초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시기에 유대인 이주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본격화된 것이다. 국제적인 정치권력의 이해관계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 종교갈등은 더욱 증폭되는 양상이다.
세계 제일의 인구 국가인 인도의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의 갈등은 수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특히 영국 식민지 시기와 그 이후 독립 과정에서 심화되었다. 솨거행태와 마찬가지로 일부 정치 세력은 힌두 민족주의를 강조하며 종교적 긴장을 고조시키기며 권력을 유지,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한다,
나이지리아는 북부의 이슬람교도와 남부의 기독교도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는 국가이다.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인 보코하람은 나이지리아 북부에서 기독교도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며,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미얀마의 로힝야 사태는 불교도 다수 민족과 이슬람교도 소수 민족 간의 갈등이다. 2017년, 미얀마군이 로힝야족에 대한 대규모 탄압 작전을 벌이며 수십만 명의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로 피신했다. 미얀마 정부는 이 사건을 반군에 대한 대응으로 설명하는 한편 국제사회는 이를 집단 학살로 규탄했다. 이러한 현대의 종교 갈등은 종교가 그토록 강조하는 ‘종교적 관용’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이다.
종교다원주의 국가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우리나라도 전쟁까지 가는 갈등은 아니지만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이슬람의 국내 유입에 이를 적대시 하는 개신교계의 핍박이 거세졌고 기성교단은 신흥교단의 세력 확장에 이를 이단시 하며 압박하는데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최근에는 천주교와 불교간의 갈등도 많아지고 있다. ‘2027 천주교 세계청년대회’를 앞두고 정부와 지자체가 천문학적 예산을 투입하기로 하자 불교계가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정교분리 원칙에 위배되는 명백한 위헌이라는 것이다. 이밖에도 천주교가 광주 천진암과 여주 주어사지, 홍성 홍주읍성 등을 성지화하면서 불교계와 갈등이 번져가고 있다. 종교간 평화공존을 모색한다고는 하지만 그 방안이 각자의 주장을 펼치며 상대의 양보를 요구하는 것이어서 평행선을 그을 수 밖에 없다.
이밖에도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 종단, 종파간 갈등은 수없이 없다. 과거의 역사에서도 토속신앙과 기존 종교는 새로운 종교가 유입될 때마다 탄압을 해 왔다. 신라시대 불교가 유입될 때 이차돈 순교가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천주교 순교자들의 희생이 잇따랐다.
원효가 일찍이 ‘화쟁사상’을 펼친 것은 당시에도 다양한 종파와 이론적 대립이 있었기에 이를 소통시키고 더 높은 차원에서 통합하려는 노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간, 종단종파간 갈등 해소 노력은 과거나 현재나 허공의 메아리처럼 떠 돈다.
‘다름은 아름답다’며 화이부동(和而不同)), 자타불이(自他不二) 등의 정신을 강조하는 종교의 갈등도 이럴진데 세속의 권력과 세력 확보가 근본인 이념ㆍ진영간의 갈등은 더욱 요원할 수 밖에 없다. 각종 해소방안들이 쏟아져 나오지민 각 집단의 주장이거나, 균형 갖췄다는 대안도 허공의 메아리로 그친다.
AI에 ‘이념ㆍ진영 갈등 해소책’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어느 정치평론가, 사회학자보다 빨리 그리고 포괄적이고 균형 갖춘 답안이 나왔다. 교육을 통한 이해 증진, 소통과 대화의 장 마련, 공정한 미디어 환경 조성, 경제적 불평등 해소, 법과 제도를 통한 갈등 관리, 지역사회 차원의 활동 강화 등 6개 항목으로 나눠 정리해 놓은 모범답안이었다. 각 전문가들의 모든 지식과 지혜을 한데 모아 모았다. 그렇기에 더욱 뜬구름 잡는 해소책으로 보였다. 다행인 것은 아직 AI가 특정집단의 학습을 일방적으로 받지 않아 요즘의 SNS나 방송패널같이 편향된 주장을 늘어놓지 않는 것이었다.
어느 때, 어느 곳에도 있어왔던 갈등은 전쟁, 폭력 같은 극한에 이르지 않으면 오히려 삶과 사회의 활력소와 발전이 되기도 했다. 마치 한 개인의 갈등이 자아 성찰과 성취에 도움을 주는 것과 같다. 내 안의 갈등을 자기 성찰과 수양으로써 분노와 좌절, 가학과 자학으로 표출되지 않으면 평온을 찾는다. 이 역시 뜬구름 잡는 이야기같지만 실현가능한 자기계발이다. 정시, 사회, 종교에서의 갈등도 한 개인의 갈등처럼 조절할 수는 없는 것일까. 각 개인의 심성이 모아져서 정치, 국가, 사회, 종교 집단의 심성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일까.
세상과 인간들이 이기적이라는 통념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인간이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전제 하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역사학을 공부한 네달란드의 언론인이자 사상가인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성선설’을 내세우는 듯 그 희망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받는 인물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비롯해 ‘호모 이코노미쿠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등 ‘성악설’을 근간으로 한 사상들이 점령하는 상황에서 “선한 본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협력과 연민은 얼마든지 전염될 수 있으며 이것이 사회를 재조직하는 근본 원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브레흐만은 기독교 원죄의식과 토마스 홉스 등으로 이어져온 인간 본성에 대한 비관적 인식이야말로 우리가 처한 불평등과 혐오, 불신과 같은 모든 비극의 기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방대한 사료, 심리학, 진화생물학, 인류학, 철학, 문학의 분야를 통섭하며 인간의 선한 본성에 관한 무수한 증거를 찾아낸다. 사료의 실증연구와 현장탐사를 통한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분석이다.
‘이기적 인간’이라는 프레임을 부수는 그의 책 ‘휴먼카인드’는 세상의 통념과 상식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며 출판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출판과 동시에 세계인들의 지성을 자극하며 기존의 통념을 뒤엎고 있다. 일개 독자인 나도 석학들의 극찬처럼 ‘인간 본성에 관한 관점, 나의 신념’ 등이 전염되 오는 듯 하다.
그는 엘리트와 종교 권력 등이 우리 안의 선한 본성을 부정함으로써 그들이 통제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활용했다고 단언한다. 일반인들도 스스로의 착한 본성을 의심함으로써 스스로 권력의 통제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와 사회를 이루는 핵심 제도인 학교, 기업, 교도소 등은 인간이 악하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권력에 의해 설계되었다고 강변한다. 우리의 정치 경제적 시스템, 지식과 세계관 등이 인간에 대한 냉소적 견해를 기반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언론들은 이러한 상황을 자극적으로 구미에 맞게 보도함으로써 확고히 굳혀나간다고 했다.
‘휴먼카인드’에서는 역사와 권력과 미디어가 감춰온 인간의 선한 면모들을 밝혀주고 있다. 또한 현 인류가 타인과 협력하고 공감하도록 진화해온 유일한 종임을 알려준다. 세상과 타인을 바라보는 적대적인 관점이나 의심과 냉소의 시선을 거두도록 돕는다. 그럼으로써 매일 흘러나오는 종교갈등, 민족갈등, 이념갈등 등 악마적 행태가 인간의 전부는 아니라는데 방점을 찍는다. 얼마든지 선한 본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갖가지 갈등과 전쟁, 폭력, 혐오를 초월한 사회를 재정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한다.
그러나 브레흐만이 전적으로 성선설에 의존해 인류 사회와 역사를 그려낸 것은 아니다. 그는 인간의 선함 속에서 나타나는 폭력과 갈등 등 부정적 요소도 보여준다. 뇌하수체에서 자연적으로 분비되는 옥시토신이란 호르몬은 사랑과 유대감, 친밀감, 유대감 등 선한 심성에 작용한다. 가족 혹은 친구 등 가까운 공동체에는 더 많이 분비되는 옥시토신이 오히려 다른 집단을 대할 때는 적대감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낯 모르는 타인이나 타인종, 타종교, 타민족과는 갈등을 일으킨다고 본다. 옥시토신이 사랑, 공감같은 심성과 함께 그와 대척되는 것들에는 그만큼의 배척, 분노의 감정을 표출시킨다는 것이다. 선함과 악함이 공존하는 셈이다, 인류 역사에서 잉여 재물이 축적되며 그에 따른 계층이 생겨난 농경사회부터의 변화랄 수 있다. 지배자와 종교 등의 권력은 더욱 권력을 유지, 강화시키는데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왔다.
브레흐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 세력이 나타나기 이전 인간의 선한 본성을 인식하고 깨달음으로써 옥시토신의 역작용을 막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역작용이 현재 많이 개선되고 있음을 본다. 장애자들에 대한 편견으로 그들이 내 집을 방문했을 때 소금을 뿌리던 행패가 이젠 사라지고 있지 않은가.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음도 느낄 수 있다. 그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갖춰가는 것이다. 뒤늦게나마 20세기 들어 인종 편견, 여성차별에 대한 선한 인식도 생겨난다. 이에는 언론도 가세하고 있는 모양새다.
인간과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현재의 선악, 정의와 불의, 옳고 그름도 변한다. 나와 다른 상대편한테도 사랑과 친밀감 호르몬이 분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인간과 세상이 달라진다. 선악, 정의와 불의, 옳고 그름의 구별도 사라진다. 그것이 인간 본성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만들어 준 브레흐만의 의도일 것이다. 갈등폭발 등 위기의 순간에 인간은 선한 본성에 압도당한다는 믿음을 준다.
*PS 정치와 이념 갈동, 종교 갈등 등 각종 집단갈등과 폭발위험을 거론하며 그러한 갈등을 해소할 인간의 선의를 생각해본 글이 길어졌다.갈등해소 해법에 대한 뚜렷한 결론도 없이 뜬구름 같은 이야기이니 내가 생각하기에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것 같다.
그런 가운데 불쑥 카톡으로 만화들이 전해졌다. 6이란 숫자를 마주 보는 사람이 9라고 주장하며 티격태격하는 그림에 ‘그대가 옳다고 상대가 틀린 건 아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지 않았을 뿐’이란 설명을 달았다. 원고 40매에 담아놓은 내 단상들은 그저 잡상(雜想)일 뿐이란 부끄러움이 들게 한 한컷 만화였다. 그 외에도 인간세상의 갈등해법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두컷의 만화를 더해 주었으니 만화들을 전해준 친구가 고마웠다. 긴 잡상의 원고의 의도를 간단명료하게 짚어준 만화들의 출처를 원고 편집에 밝히기 위해 물어 보았다. 그러나 모른다는 답변이 돌아왔고 SNS에 수없이 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만큼 선한 심성을 확산시키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였다. 반가운 일이다.
기왕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김에 만화의 품격에 어울리는 추신을 덧붙이고 싶다. 불교를 일관하는 기본 교의 또는 사상인 ‘일체개공(一切皆空)’이다.
일체개공은 ‘본래 없다가 단지 지금 있는 것’(本無今有=空卽是色)이고 지금의 있음이 지나면 없음으로 돌아가는 것(已有還無=色卽是空)을 뜻한다. 그저 ‘없다’(空)는 것이 아니다. 갈등과 인간 심성 등 내가 늘어놓은 이야기들은 영원히 뜬구름처럼 떠다닐 것이지만 정해진 실체와 근본은 텅 비어있을 뿐이다. 돌고돌아 변하기도 하고 흩어지기 때문이다. 다만 우주 삼라만상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세, 종교와 사상, 인간과 천상, 진리와 비진리, 선악, 정의와 부정의 등 모든 실체가 잠깐이든 길게든 윤회하며 변화하며 진화한다는 가르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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