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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불선 심지어 서교(西敎)까지 혼합한 자리는 바로 풍류도

변찬린 | 기사입력 2024/12/03 [18:56]
변찬린의 ‘선고[僊(仙)攷’-풍류도와 증산사상

유불선 심지어 서교(西敎)까지 혼합한 자리는 바로 풍류도

변찬린의 ‘선고[僊(仙)攷’-풍류도와 증산사상

변찬린 | 입력 : 2024/12/03 [18:56]

<연재순서>

종교의 본질

2. [()의 본의

3. 풍류도(風流道)에 대한 재고찰

4. 풍류도에로의 회귀 원시반본(原始返本)

 

단군의 무()는 대도의 무()로서 선()의 동의어

 

유불선 삼교가 이 나라에 수입되기 전에 이 나라에는 고유한 종교가 있었으니 그것이 곧 풍교(風敎)인 풍류도였다. 오늘날 일부의 학자들은 상고시대에 있었던 고유종교를 무교(巫敎)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학적 단견일 뿐이다. 단군시대의 무()의 개념(槪念)을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무()의 개념(槪念)과 혼동하여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단군의 무()는 대도의 무()로서 선()의 동의어였다. 김범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임(仙音)이니 그러면 센은 무엇을 말함인가? 북도(北道)말에 새인은 무당(巫堂)을 말하고 경상도(慶尙道)에서 산이가 무당(巫堂)이다. 그러므로 산이 씨가 무당의 씨자라고 하는 속단(俗談)이 있고 땅재주하는 사람이 아이쿠 산이로 구나하는데 이것은 강신(降神)하는데 쓰는 소리이다. 이니 이니 하는 어원(語源)은 근본(根本) 샤만에서 온 것이다. 시베리아·만주·몽고에서 共通(공 통)하게 사용하는 샤만은 곧 巫堂(무당)이란 뜻이다. 이것은 만몽계(滿蒙系)의 고대문화(古代文化)와 공통성(共通性)을 가진 신도사상(神道思想)에서 온 것인데 무당 중에 강신(降神)이 잘되는 것을 사얀이라고 한다. 기독교의 성신(聖神)과 같다. 신집히는 사람을 사얀이라고 한다. 이나 세인」 「산이모두가 샤만에서 파생된 것이다>(東方思想論業 第十二講, 丹學仙道, p.71)

 

상고시대에는 산이곧 무당(巫堂은 선()의 음()에서 파생된 말이었다. 그러므로 상고의 무()의 개념은 오늘날 시정(市井)에서 점을 치는 타락한 소무(小巫)들과는 구별(區別)해야 한다. ()의 대도를 깨치고 성신(聖神)의 강신(降神)을 받고 신선(神仙)의 비의(秘義)를 깨치고 터득하는 대무(大巫)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무자(巫字)와 복자(卜字)는 고대시대에는 대도에서 사용한 글자였으나 인간이 타락함으로 인하여 오늘날 무자(巫字)와 복자(福字)는 하차원의 심령(心靈)들을 상대하여 점이나 치는 저급 미신으로 전락되고 말았다.이와 마찬가지로 풍교(風敎)인 풍류도도 타락하여 풍월도(風月道)가 되었고 술 먹고 춤추는 행위를 풍류(風流)로 착각하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술 잘 먹고 노래 잘 부르는 한량(閑良)들을 풍류객(風流客)이라 부르는 것도 풍류도가 자취를 감춘 이후 속화(俗化)된 현상에서 나타난 것이다.

 

▲ 최치원은 「낙랑비서」에서 풍류의 정체를 ‘유불선 삼교를 다 포함한, 예로부터 내려오는 신령스러운 도’라고 밝혔다. 신교는 한민족의 전통 도가사상으로 9천년 한민족을 이끌어 온 원동력인 것이다.

 

그럼 풍류도의 진면목은 무엇인가? 왜 현묘지도(玄妙之道)를 풍류도라 이름했을까? 풍류(風流)란 어휘 속에는 어떤 비의(秘義)가 있는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난랑비서(鸞郎碑序)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國有玄妙之道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三國史記, 新羅本紀, 眞興王條)

 

(나라에 玄妙(현묘)()가 있으니 일컬어 風流(풍류)라 한다. 設敎(설교)의 근원이 仙史(선사)에 상비하였으니 실로 三敎(삼교)包含(포함)하고 群生(군생)接化(접화)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면 집안에 ()하고 ()하면 나라에 ()하였으니 魯司冠(노사관)(孔子(공자))(), 無爲(무위)한 일에 처하여 不信(불신)()를 행하였으니 이는 周柱史(주주사)(老子(노자))諸惡(제악)을 짓지않고 諸善(제선)奉行(봉행)하였으니 이는 竺乾太子(축건태자)(釋迦(석가))())

 

이처럼 고운(孤雲)이 쓴 난랑비서(鸞郎碑序)의 난랑(鸞郎)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미 전술한 바 있거니와 난랑(鸞郎)은 신선(神仙)의 이칭(異稱)이다. 난랑(鸞郎)은 신선(神仙)의 이칭(異稱)인데 그 이름을 난새에 비유하였다. 난새()는 곧 봉황(鳳凰)의 이름이다.

봉황(鳳凰)은 실재하는 비조(飛鳥)가 아닌 영조(靈鳥)이다.

 

<중국문헌(中國文獻)에 봉황(鳳凰)은 인조성저(仁鳥聖鳥)요 동방조선(東方朝鮮)에서 출생(出生)하여 전세계(全世界)에 날아다닌다고 하였다>(崔仁 著, 韓國學講義, p.1)

 

이처럼 봉황(鳳凰)의 출생지는 한국이다. 이는 선()의 풍류(風流)가 한국에 연원하고 있음을 오색(五色) 무늬의 봉황새를 통해 상징화하고 있는 것이다. 봉황새는 바람새 곧 풍새(風鳥)이다. 봉자(鳳字)는 바람 풍자()와 새 조자()의 합성어이다. 바람새 곧 난새는 풍교(風敎)인 풍류도의 상징이다.

 

그럼 왜 현묘지도(玄妙之道) 곧 신선도(神仙道)를 풍교(風敎) 또는 풍류도라 했을까? 인간이 장생불사(長生不死)하다가 우화등선할 때는 산에 들어가서 산바람() 속에서 그 육신은 해체하고 신선(神仙)으로 화()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산에서 풍류체(風流體)가 되어 회오리바람을 타고 무적(無跡)히 승천하기 때문에 선()을 풍류체(風流道)라고 하는 것이다. 신선(神仙)은 그 몸이 풍류체(風流體로 화()한 사람들이다. 신선(神仙)은 신령한 바람을 타고 우주화된 인간을 말한다. 지구라는 말에서 수렴되어 영원한 우주의 차원에서 자유로운 바람을 타고 소요(逍遙)하는 무애자재(無涯自在)의 완성된 인간인 것이다. 이런 풍류도의 도비(道秘)를 모르고 풍류도라면 술 먹고 노래부르고 풍월(風月)이나 농()하는 종교로 오해하여 일명(一名) 풍월도(風月道)라는 이름까지 생겼으니 이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화랑(花郞)들이 명상대찰에 노닐면서 풍월(風月)을 농()한 것은 참 의미의 풍류도가 아닌 타락된 풍류도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화랑도(花郞道)란 풍류도가 사라진 다음에 나타난 외도(外道)요 아류(亞流)이다.

 

▲ 예수와 니코데모의 ‘거듭남’에 관한 대화. 예수는 인간이 거듭나면 풍류체(風流體), 곧 신선(神仙)이 된다고 말씀했다. 그러나 유대교의 최고지도자인 니고데모는 선(僊)의 비의(秘義)를 깨닫지 못했다.

 

예수는 영생의 도()가 풍류도임을 성서 속에서 증언

 

필자(筆者)는 성서 속에 선맥(僊脈)이 비장(秘藏)되어 있음을 밝혔거니와 다음 성구는 우리들에게 깊은 암시를 던져주고 있다. 예수는 영생의 도()가 풍류도임을 성서 속에서 증언하고 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官員(관원)이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先生(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表蹟(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 母胎(모태)에 들어갔다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으로 난 것은 ()이요 聖靈(성령)으로 난 것은 ()이니 내가 네게 거듭 나야하겠다는 말을 奇異(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거니와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신약 요한복음 31~9

 

예수와 니고데모의 이 신적 도담(神的道談)은 실로 엄청난 도비(道秘가 숨어 있는 것이다. 이 성구 속에서 예수는 거듭난 사람은 풍류체(風流體)가 됨으로 <바람이 임의로 불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비유하고 있다. 예수는 인간이 거듭(重生)나면 풍류체(風流體) 곧 신선(神仙)이 된다고 말씀했다. 그러나 유대교의 최고지도자인 니고데모는 선()의 비의(秘義)를 깨닫지 못했다. 거듭남 곧 중생(重生)을 기독교인들은 알기를 살인강도가 예수 믿고 선량(善良)하게 되는 것인 줄 알고 있다. 이런 윤리적 도덕적 중생(重生)이 성서가 말하는 중생(重生)이 아니다. 윤리적 도덕적인 중생(重生)은 기독교가 아니더라도 유불선을 믿고도 얼마든지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성서가 제기하고 있는 중생(重生)의 비의(秘義)는 타락한 인간 그 존재 자체가 도태(道胎) 속에서 변화받아 죽을 인간이 죽지 않는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현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늙으면 어머니 모태(母胎) 속에 어떻게 다시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가하고 우문(愚問)을 던진다. 타락한 인간들은 육태(肉胎)만 알았지 도태(道胎)를 모르고 있다. 성신(聖神)을 받아 중생(重生)하면 인간은 부활의 도() 곧 영원한 신선(神仙)의 길이 개명(開明)되는데 성서를 매일 보는 기독교인들조차 이 비의(秘義)를 모르고 있으니 어찌할 것인가?

 

거듭남이란 선적개념(仙的槪念)으로는 환골탈태(換骨奪胎)를 의미한다. 장생불사(長生不死) 환골탈태(換骨奪胎) 천의무봉(天衣無縫) 우화등선(羽化登仙)의 선적개념(仙的槪念)들은 선맥(僊脈)이 끊어진 후 다 잘못 인식되고 있다. 이 나라 고유한 종교인 風敎(풍교) 風流(풍교)는 인간을 풍류체(風流體의 신선(神仙으로 만들어 영생의 차원으로 우화등선케 하는 대도이다.

 

증산은 말했다.

 

<하루는 종도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세상에 성()으로 풍()가가 먼저 났었으나 전()하여 오지 못하고 사람의 몸에 들어 다만 체상(體相)의 호칭(呼稱)만 쓰게 되어 풍신(風身) 풍채(風釆) 풍골(風骨) ()으로 일컬케 될 뿐이요 그 다음에 강()가가 났나니 강()가가 곧 성()의 원시(原始). 그러므로 개벽시대(開闢時代)를 당하여 원시로 반본(返本)하는 고()로 강()가가 일을 맡게 되나니라>(大巡典經 p.122)

 

이 말씀 중 풍()씨를 인간의 시성(始性)으로 본 것은 참으로 탁견(卓見)이다. 시성(始性)이 풍씨(風氏)인데 이는 곧 풍류도인 신선(神仙)의 비의(秘義를 깨친 자의 성()임을 직감할 수 있다. 그러나 선맥(僊脈)이 끊어지고 풍류도의 본질이 은폐되므로 말미암아 풍()씨도 사라지고 강씨(姜氏)가 시성(始性)으로 등장한다. 이 강씨(姜氏)는 곧 여자가 낳은 양()을 의미한다. 기독교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면 첫 아담이 타락하므로 풍교(風敎)를 상실했으므로 풍씨성(風氏性)은 남상(濫觴)되지 못한다. () 아담인 예수가 여자의 몸을 통해 어린 양()으로 오니 뜻으로 보면 강()씨라 할 수 있다, 예수는 어린 양으로 와서 풍류도의 길을 성서 속에 제시하고 풍씨(風氏)가 되어 우화등선했던 것이다.

 

풍씨(風氏)는 곧 풍류도를 깨친 자의 도성(道性)이다. 단군께서 만약 성()이 있었다면 풍씨(風氏)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산에 들어가 산바람()을 타고 최초로 풍류체(風流體)가 되어 승천한 신선(神仙)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증산이 말한 풍씨(風氏) · 강씨(姜氏) ()은 도성(道性) 즉 뜻으로 풀이해야지 우리들 혈대(血代)와 혈맥(血脈)의 성()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천도(天道)는 유불선(儒佛仙)이 아니로되 유불선이 천도의 일부분

 

난랑비서에 고운은 풍류도는 삼교를 포함(包含)한다고 했다. 이 말은 유불선 삼교를 혼합한 것이 풍류도가 아니라 풍류도의 신기(神器) 속에는 이미 삼교의 진리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중대한 도적암시(道的暗示)를 던져주고 있다. 풍류도는 그 신기(神器) 속에 유불선의 양식을 담고 있지만 풍류도 자체는 유()도 아니고 불()도 아니고 선[((道敎))도 아닌 것이다. 이불비불(以佛非佛) 이유비유(以儒非儒) 이성비선(以仙非仙)이 풍류도의 본질이다.

 

수운(水雲)40회 생신을 맞아 최시형(崔時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도()는 유()도 아니고 불()도 아니고 선()도 아니다. 그러나 유불선(儒佛仙)이 합일(合一)되어 있는 것이다. 즉 천도(天道)는 유불선(儒佛仙)이 아니로되 유불도(儒佛仙)이 천도(天道)의 일부분(一部分)이다. ()의 윤리(倫理)와 불()의 각성(覺性)과 선()의 양기(養氣)는 사람이 성()의 자연(自然)된 품부(品賦)이며 천도(天道)의 고유(固有)한 부분(部分)이니 내 도()는 무극대원(無極大源)을 잡은 것이다.>(宋鎬洙 編著, 民族正統思想探求, p.279)

 

이 수운의 말은 참으로 명언이다. 그가 말한 무극대원(無極大源)의 도가 곧 풍류도 임을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동학은 그 연원이 현묘지도(玄妙之道)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증산도 마찬가지이다.

 

<선도와 불도와 유도와 서도(기독교)는 세계 여러 민족의 문화의 근원이 되었나니 이제 그 종장을 불러모아 통일케 할 것이며 모든 도통신과 문명신을 거느려 모든 문화의 정수를 뽑아모아 통합하리라>(李能和 著, 朝鮮道敎史, p.82)

 

유불선 심지어 서교(西敎)까지 혼합한 자리는 바로 풍류도의 자리인 것이다. 증산이 유서(遺書)로 남긴 현무경(玄武經) 속에도 같은 사상이 담겨있는데 다음과 같다.

 

受天地之虛無 仙之胞胎

受天地之寂滅 佛之養生

受天地之以詔 儒之浴帶

冠旺

兜率 虛無寂滅以詔

 

(천지의 허무한 기운을 받아 仙道(선도)(도교)가 포태(밴다는 뜻)하고 천지의 적멸한 기운으로 불교가 養生(양생)(낳아서 기른다는 뜻)하고 천지의 이조(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조칙과 같은 뜻)로서 유교가 욕대(아기를 낳은 다음에 멱감기고 옷입힌다는 뜻) 하니 관왕(성년이 됨)은 이 허무와 적멸과 욕대를 거느린다.)

 

여기서 도솔(兜率)의 자리 곧 유불선을 거느리는 자리가 풍류도의 자리임을 알 수 있다. 증산이 예언한 <풍류주세백년진(風流酒洗百年塵)>도 풍류(風流)의 도()로써 후천이 개벽됨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선천(先天) 상극(相克) 속에서 살던 인간들은 대도를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무덤을 남기는 존재가 되었지만 후천선경(後天仙境)이 개벽되면 이 땅에는 무덤이 없는 선()의 대도가 현대의 고속도로처럼 우리 앞에 열려올 것이다.

 

() 본래의 자리에서 보면 유불선은 풍류도에서 흘러내린 한 가닥 지류였다. 풍류도야말로 모든 종교의 연원이요 유불선은 열교임을 알 수 있다. 대도인 풍교(風敎)가 인간의 무명과 타락으로 폐()해지고 상실한 다음에 나타난 것이 유()요 불()이요 선[(道敎)]이었다. 풍류도의 자리는 만법(萬法)이 남상(濫觴)한 연원의 자리인 동시에 만법(萬法)이 귀일할 수 있는 바다(法海)인 것이다. 풍류도 안에서 모든 종교는 아집과 독선을 버리고 일미(一味)가 될 것이다.

 

풍류도는 天下(천하)神器(신기)이다. 지난날 어느 종교도 선()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죽어서 천당 극락하는 식으로 사자(死者)의 종교, 사후(死後)의 피안종교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 땅 위에 무덤을 만들지 않고 자손에게 더럽고 추악한 시신을 남겨놓지 않은 종교의 진리는 선() 밖에는 없는 것이다.

 

성서에 흐르는 道脈(도맥)이 선맥(僊脈인 것은 실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과 성서의 도맥(道脈)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한 논문을 발표할 것을 약속한다)

 

이 지구는 인간의 무덤으로 오염되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선맥(僊脈)을 계승했다면 유불선 삼교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지구는 무덤이 없는 선경(仙境)이 되었을 것이다.

 

난랑비서를 쓴 고운 최치원도 시신을 남기지 않고 선화(僊化)되었다.

 

<一日) 早起出戶 遺冠屨於林間 莫知其所之 盖上賓也) 寺僧 以其日薦冥禧)>(李能和 著, 朝鮮道敎史, p.82)

 

(하루는 일찍 일어나 문 밖에 나가 갓은 나뭇가지에 걸고 신은 수풀 사이에 버려 둔 채 간 곳없이 사라졌다. 아마도 승천하였을 것이라 하여 절의 중들이 집나간 날 로 명복을 빌었다.)

 

이 얼마나 깨끗한 선화(僊化)인가? 이 얼마나 시적(詩的) 해체인가?

 

고운은 자식들에게 시신을 남기지도 않고 가야산 언덕에서 산바람()을 타고 무적(無跡)히 승천했던 것이다. 이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인 것이다. 

 

땅에서 즐겁게 장생불사(長生不死)하다가 지혜가 백수(白首)가 되면 천거(遷去)할 때는 입던 도포(道袍) 복사꽃 요요(夭夭)하게 핀 나뭇가지에 걸쳐놓고 신던 신발은 금잔디 위에 가지런히 벗어놓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선화(僊化)되는 모습이야말로 한 폭()의 시화(詩畫)가 아니겠는가. 후천선경(後天仙境)이 개벽되면 새로 이 땅 위에 회귀한 사람들은 선()의 대도를 깨달아 장생불사(長生不死) 환공탈태(換骨奪胎) 천의무봉(天衣無縫) 우화등선(羽化登仙)의 도행(道行)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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