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찬린의 ‘선고[僊(仙)攷’-風流道(풍류도)와 甑山思想(증산사상)
성서는 선(僊)의 문서, 죽지 않고 산 채 遷去된 昇天의 기록이 있다변찬린의 ‘선고[僊(仙)攷’-風流道(풍류도)와 甑山思想(증산사상)<연재순서> 1. 종교의 본질 2. 선[僊(仙)의 본의 3. 풍류도(風流道)에 대한 재고찰 4. 풍류도에로의 회귀 ─ 원시반본(原始返本)
본래적인 인간이란 죽음의 존재가 아니라 <사라지는 존재>
선(僊)이란 무엇인가? 김범부(金凡夫)는 선(僊)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선(仙은 인변(人邊)에 산자(山字)를 하거나 또는 선자(僊字)로 쓰는데 산에 사는 사람 또는 인간에서 천거(遷去)한 사람이란 뜻의 회의문자(會議文子)이다」
선(仙)과 선(僊)은 동의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선(僊)의 도비(道秘)가 그 맥이 끊어진 후 선(仙)으로 나타난 듯하다. 선(仙)은 산(山)사람이란 뜻이지만 선(僊)은 천거(遷去)된 사람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산(山)사람 선(仙)과 천거(遷去)된 사람 선(僊)은 동의어인 듯하나 차이가 있다. <천거(遷去)된 사람>이란 자리를 옮긴 사람이다. 죽어서 자리를 옮긴 것이 아니라 살아서 자리를 옮겨 신선(神仙)된 사람을 선(僊)이라 한다. 이승에서 <새이승>으로, 3차원 세계에서 4차원 세계로 자리를 옮긴 사람을 선(僊)이라 한다. 또 선(僊)의 본의는 <비양승고(飛揚昇高)>로서 하늘로 올라가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 비양승고(飛揚昇高)는 죽어서 그 영혼이 귀천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승천(昇天)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범종에 새겨진 비천상(飛天像)을 보라. 그 옷깃이 바람에 날리면서 하늘로 날고 있는 비천상(飛天像)은 곧 우화등선의 그림인 것이다.
선(仙) 곧 산 사람이란 뜻은 인간이 신선(神仙)이 될 때 산(山)에 가서 이내결(嵐)에 그 육신을 해체시키고 풍류체(風流體)가 되어 선(僊)으로 변신(變身)되는 뜻이 숨어 있는 것이다. 본래적인 인간은 무병장수하다가 선화(僊化)될 때는 산(山)으로 가서 무적(無跡)하게 자취를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적인 인간이란 죽음의 존재가 아니라 <사라지는 존재>인 것이다. 단군도 산에 가서 선화(僊化)된 사람이었다.
또 선(僊)이 선(仙)으로 비하(卑下)한데는 한가지 이유가 있다. 이 날까지 일부의 학자들이 선도(仙道)라 하면 중국에서 유입된 종교로 오해하고 있다. 또 선도(仙道)의 교조(敎祖)를 노자(老子)로 착각하고 있다. 본래 선[僊(仙)]의 원적지는 청구(靑丘였고 선(僊)의 하늘을 개천(開天한 사람이 단군이었다. 선(仙)의 연원(淵源)이 우리나라에 있음을 金凡夫(김범부)는 다음과 같이 考證(고증)하고 있다.
이처럼 선사상(仙思想)의 연원지(淵源地)는 우리나라인 것이다. 이것이 중국으로 건너가 다시 도교의 옷을 입고 역수입되었다. 왜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신선도(神仙圖)가 중국으로 건너가 다시 역수입되었는지 그 이유는 문헌과 사료가 전무하므로 밝힐 길이 없다. 그러나 신선사상(神仙思想)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이능화(李能和)는 그의 명저 <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檀君三世之事 最近道家三靑之說 盖我海東爲神仙淵業 內外典籍俱無異辭 而自古言神仙者 皆謂黃帝問道於崆峒之廣成子 雖然晋 葛洪撰抱朴子卽謂黃帝東到靑丘 受三皇內文於紫府先生 紫府先生者 卽東王公而其在東方 故世謂東君者也 壇君是東方最初之君 而設檀祭天者 故稱檀君 而基君子類似於東君帝君及眞君等 仙家之稱 亦類於震中君湘君 神君之號 故檀君子 謂仙 亦可謂神 曰仙( 是屬古代之事 雖慾深究 而無可深究之道 則但可任其線藐而己 至若泰時方士 韓終來東之跡 證據最確 而盧生張良 疑亦來東 或求籙圖 或尋道友 此以彼等行履 推之 則有七八分彷彿者也」(李能和 著, 朝鮮道敎史 總說, p.23)
(단군 삼대의 신화와 최근 도가의 삼청설은 다 우리 해동이 신선의 연원이라고 국내의 서적들은 한결같이 말하고 있다. 예로부터 신선을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황제가 공동에 있는 광성자에게 도를 물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진나라 갈홍이 지은 포박자에는 황제가 동쪽 청구에 와서 자부선생에게 삼황내문을 받았다고 하였다. 자부선생은 즉 동왕공으로서 그가 동방에 있는 까닭에 세상에서는 동군이라 이르는 것이다. 단군은 동방 최초의 임금으로서 단을 모으고 하늘에 제사하였으므로 단군이라 하며 그 군자는 동군 제군 및 진군 등의 선(仙)의 용어이며 또한 운중군 상군 등 신군의 이름과 같은 것이다. 이로 보아 단군이라 함은 선(仙)이라 할 수 있고 신이라 할 수도 있다. 이 신이나 선은 다 고대의 일이므로 깊이 연구하려 하여도 탐구할 수가 없으니 다만 옛일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진나라때 방사 한종이 동국에 온 자취에 대해서는 그 증거가 뚜렷하며 노 생과 장량이 동국에 와서 녹도를 구해가지고 혹은 도우를 찾은듯도 한데 그들의 행 적을 추적하면 칠팔분 방불함이 있다 하겠다.)
이처럼 선(僊)의 연원은 우리나라였고 상대(上代)에 이것이 중국으로 건너가 도교의 의상(衣裳)을 입고 다시 우리나라의 역수입되었던 것이다. 상고시대(上古時代) 황제(黃帝)에게 신선도(神仙道)를 배워준 광성자(廣成子)나 자부선생(紫府先生)은 다 우리나라 사람이었다. 그 후에도 한종(韓終)이나 장량(張良) 등이 청구(靑丘)에 와서 신선도(神仙道를 배워갔음을 알 수 있다. 최인(崔仁)은 그의 역저 <한국학강의(韓國學講義)>에서 중국의 도교와 우리나라의 도교가 별개의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도교(道敎)는 신선사상(神仙思想)으로 창설한 종교이다. 중국 노자(老子)가 신선사상(神仙思想)으로 창설한 교(敎)를 도교(道敎)라 칭한다. 노자(老子)는 중국이 신선사상으로 도교(道敎)를 창설하고 동명왕(東明王)은 한국(韓國)의 신선사상(神仙思想)으로 독특(獨特)한 도교(道敎)를 창설(創設)하였다. 단군은 불사(不死) 입산(入山)한 신선(神仙)이다. 그런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동영왕(東明王)이 단군의 자(子)라 하였다. 즉 신선(神仙)의 자(子)라 하였다. 그리고 동문선(東文選)에 동명왕(東明王)이 신선(神仙)을 거느리고 하늘에 오르내리었다 하였다. 또 호태왕비문(好太王碑文) 첫머리에 동명왕(東明王)이 용(龍)을 타고 승천(昇天)하였다고 한다. 구삼국사기(舊三國史記)에 동명왕(東明王)이 죽지 아니하고 승천(昇天)하니 태자(太子)가 그 옥편(玉鞭(을 용산(龍山)에 장사하였다고 한다. 이상(以上)의 모든 기록을 고찰하면 동명왕(東明王)이 고유한 신선사상(神仙思想)을 계승한 것이 분명(分明)하다. 신선사상(神仙思想)을 계승한 동명왕(東明王)은 다시 신선사상(神仙思想)을 발전시켜 고구려(高句麗)의 도교(道敎)를 창설(創設)하였다.」(崔仁 著, 韓國學講義, p.166)
이처럼 최인은 중국의 도교와 한국의 도교를 분리하여 생각한다. 그러나 중국의 도교이든 한국의 도교이든 이미 선(僊) 본래의 자리에서 볼 때는 다 근본을 잃은 후에 나타난 아류(亞流)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단제(丹齋)는 <선비>를 선(仙)의 유명(遺命)으로 본다.(丹齋全集 下, p.101) 고려에서는 선비들이 조의(皂衣)를 입어 조의선인(皂衣先人)이라 했고 신라에서는 미모(美貌)를 取(취)하여 花郞(화랑)이라 했다. <선비>가 선(仙)의 음사(音寫)에서 유래된 것은 틀림이 없으나 선비정신도 선(僊) 본래의 자리에서 보면 한가닥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의 도교는 그 조종(祖宗)을 노자(老子)로 하고 그를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섬기는데 이는 후대의 인간들이 잡다한 신선사상을 혼합하여 도교를 만들면서 노자의 이름을 도용한데 지나지 않다. 왜냐하면 노자 도덕경(道德經) 어디에도 신선(神仙)에 대한 말은 전무(全無)하다. 이미 김범부도 밝힌 바 있지만 신선(神仙)이란 말은 장자(莊子)에서 비로소 발견되고 있다.
또 도교를 숭상하는 자들이 단학(丹學)에 몰두하여 단학(丹學)을 신선사상과 결부시키고 있는데 이것도 외도(外道)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단(丹)은 내단(內丹) 외단(外丹)이 있다. 물질로 조제된 약(藥)이 외단이고 정기신(精氣神)을 의집하는 것을 내단이라 한다. 갈홍(葛洪)이 지은 포박자(抱朴子)에는 내단과 외단에 대한 설명이 있다. 외단은 환약(丸藥)을 적용하는데 그것은 진 나라 시황 한무제가 가장 숭상하여 삼신산(三神山)에 불로초(不老草)를 구하러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보낸 사건은 너무나 유명하다. 특히 외단은 금석지재(金石之材)를 많이 사용하는데 연홍(鉛汞)을 불사약(不死藥)이라 일컬었다. 또 운모(雲母)를 물로 만들어 운모수(雲母水)를 먹으면 장생불사한다고 믿었다. 그 다음에는 치풍지재(治風之材)가 숭상되었으니 枸杞子·雲母·蒼朮·五加皮·甘菊 등이다. 이처럼 약(藥)의 힘을 빌어 영생할 방법을 모색한 중국의 도교는 외도(外道)에 치우친 종교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외단 즉 약을 먹고 불로장생하여 신선(神仙)이 된다면 역대의 제왕(帝王)이나 황금만능의 부호(富豪)들이 고가의 약을 먹고 다 신선(神仙)이 되었다면 이 세상은 어찌될 것인가?
종교는 그 본질이 마음을 닦고 영생을 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이미 필자가 삼일신고 천궁훈에서 밝혔듯이 하나님이 계신 천궁(天宮)에 갈 수 있는 자는 <유성통공완자(惟性通功完者)>여야 한다. 마음을 닦은 자 아니고는 선(僊)의 길을 개명(開明)할 수 없는 것이다.
인의(仁義)의 종교인 유불선도 명덕(明德)을 밝히고 무명(無明)을 제거하고 무위이화(無爲而化)의 자리에서 성품을 닦기를 강조하고 있거늘 어찌 약 따위를 먹고 장생불사하겠다고 망견(妄見)을 내는가? 약을 먹고 신선(神仙)이 되겠다는 외단은 방술(方術)일 뿐 선(仙)의 정도(正道)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선(僊)의 본류는 단군에게서 남상(濫觴)된다. 선(僊)의 소식이야말로 인간을 장생불사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도인데 이 도(道)를 풍류도라 한다.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郎碑序)에 「우리나라에 본래 현묘(玄妙)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칭한다. 그 교(敎)를 창설(創設)한 내력이 선사(仙史)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동문선(東文選) 팔관회(八關會) 선랑하표(仙郞賀表)에 보면 난랑(鸞郞)은 신선(神仙)이라 했고 현묘(玄妙)의 도(道)는 신선사상이요 풍류(風流)는 신선(神仙)이다. 포박자(抱朴子) 신선전(神仙傳)에 현(玄)은 도가신선(道家神仙)의 명(名)이라 하고 고려도경(高麗圖經 권(卷) 18 도교)에 노자의 선교(仙敎)를 묘교(妙敎)라 칭하고 송사(宋史)에 임령소(林靈素)가 만년에 도사(道士, 仙敎(선교)의 士(사))가 되어 신비한 일을 하므로 현묘선생(玄妙先生)이라 칭하고 신선통감(神仙通鑑)(卷四第五節)에 선녀(仙女)를 현모옥녀(玄妙玉女)라 하였다.
풍류도는 선(仙이며 현묘지도(玄妙之道)임을 알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유교와 불교 속에는 선맥(仙脈)이 없다. 도교에는 선맥(仙脈)이 연결되어 있는 듯하나 이것이 외도(外道)에 치우쳐 있음을 이미 밝힌 바와 같다. 도교를 신봉하는 자들이 얼마나 외단법(外丹法)을 잘못 사용하여 이상한 약을 만들어 혹세무민하였던가?
그런데 현묘(玄妙)한 도(道)인 풍류도에 선맥(僊脈)이 놀랍게도 성서 속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천 년 동안 서구 신학자들은 성서 속에 선맥(僊脈)이 묻혀 있음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서구인들은 선(僊)의 개념조차 모르고 있으니 성서 속에 비장(秘藏)된 선(僊)의 황금명맥을 발굴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성서는 선(僊)의 문서(文書)이다.
그럼 이제부터 잠시 성서 속에 은폐된 선맥(僊脈)을 더듬어 보자. 구약성서에 보면 에녹과 엘리야라는 두 인물이 죽지 않고 산 채 천거(遷去)된 승천(昇天)의 기록이 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더라」 (창세기 5章 24節)
창세기 5장에 소개된 이 간단한 기사를 신약의 히브리 기자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었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김으로 다시 보 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브리恕(新約) 11章 5節)
이 성구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옮겼다>는 말이다. <옮겼다>는 말은 이 장(場)에서 다른 장(場)으로 천거(遷去)됨을 의미(意味)한다. 삼차원 시공(時空)에서 사차원 시공(時空)으로의 옮김이다. 사차원은 피안이 아니라 삼차원의 자리에서 보면 새로운 장(場)인 것이다.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나라로 천거(遷去)된 사람이었다. 죽지 않고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도맥(道脈)은 선(僊)인데 에녹은 선(僊)의 비의(秘義)를 터득한 성서에 나오는 첫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에녹과 동행(同行)하다가 에녹을 산 채로 하늘나라로 옮겨갔다. 이는 에녹이 장생불사하다가 우화등선한 신선(神仙)임을 말하고 있다.
또 엘리야에 대한 기사를 보자.
「두 사람이 行(행)하며 말하더니 忽然(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隔 (격)하고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구약 列王記下 3章 15節)
이 성구를 보면 엘리야도 우화등선한 신선(神仙)임을 알 수 있다. 엘리야도 선(僊)의 비의를 터득한 선지자였다. 그뿐만 아니라 모세와 예수도 시해선(屍解仙)한 존재였다.
모세는 구약 최대의 선지자였는데 그의 시신을 묻은 묘(墓)가 없어졌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땅에서 죽어 밷브올(레바논) 맞은편 모압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날까지 그 묘를 아는자 없느니라.」(구약 申命記 34章 6節)
이 기사를 보면 모세의 묘가 없어진 신비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약 유다서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발견되는데 주목해야 한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屍體(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신약 유다書 5節)
이 이상한 성구 속에 비장된 내용은 심이 큰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모세가 시해선(屍解仙)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시해선(屍解仙)이 성서의 개념으로 볼 때 부활(復活)인 것이다. 예수도 무덤 속에서 부활했는데 그도 시해선(屍解仙)되었음을 성서는 말하고 있다.
「안식 후 첫 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여자들이 두려 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신약 누가복음 24章 1節 以下)
이 성구에서 보듯 예수의 시신도 무덤 속에서 시해선(屍解仙)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천거(遷去)되어 선화(僊化)된 신선(神仙)들은 호지 않은 천의무봉(天衣無縫을 입는다. 천의(天衣) 곧 하늘사람들이 입는 옷은 혼 자욱이 없는 무봉(無縫)한 옷이다. 그런데 요한福音(복음)에 보면 예수의 속옷은 호지 않는 옷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군병들이 예수를 十字架(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取(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않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신약 요한복음 19章 23節)
이 성구를 보면 예수는 속옷을 호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다. 현대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호지 않는 옷은 제조할 수 없다. 예수가 호지 않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속옷을 입었다는 뜻은 그가 대도인 선(僊)의 道秘(도비)를 간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예수는 변화산(變化山에서 이미 하늘의 대도인 선맥(僊脈)과 연결되었던 것이다. 예수는 변화산(變化山에서 선(僊)을 大覺(대각)하고 천의무봉(天衣無縫을 입음으로 죽어서 시해선(屍解仙)되어 부활했던 것이다. 시해선(屍解仙)하여 부활한 예수는 구름을 타고 승천하였다. 예수가 타고 승천한 구름은 저 허공에 흐르는 부운(浮雲)이 아니라 우화(羽化)를 비유한 말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단군을 <운중군(雲中君)>이라 함도 그도 구름을 타고 우화등선한 존재였던 까닭이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말은 선(仙)을 구도하는 동방(東方)에서는 수천 년 전부터 인구에 회자(膾炙)된 숙어(熟語)였으나 서구신학자들은 전혀 몰랐던 도비(道秘)였다. 선(僊)은 죽지 않고 長生不死(장생불사) 換骨奪胎(환골탈태) 천의무봉(天衣無縫 우화등선하는 참 종교이다.
설사 죽었다 해도 그 시신이 무덤 속에서 썩지 않고 시해선(屍解仙)되어 죽었다 다시 復活(부활)하여 승천하는 대도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살아서 승천하는 사람을 천선(天僊)이라 하고 무덤 속에서 시해선(屍解仙)하는 사람을 지선((地僊)이라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다음 시를 읊조리면서 선(僊)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심사(深思)하자. 이 시에서도 선(僊)은 무덤을 남기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有鳥有鳥丁令威(유조유조정령위) 作仙千載今來歸(작선천재금래귀) 城廓如故人民非(성곽여고인민비) 何不學仙塚纍纍(하불학선총류류) (盛京通志)
(새야 새야 정령위야 신선되어 천년만에 돌아왔네 성곽은 옛같건만 사람은 어이 다른고 어찌 선(僊)을 배우지 않아 빈 무덤만 즐비한고)
이 시속에 나오는 정령위(丁令威)는 요동사람이었다. (요동은 옛날 우리니라 땅이었음으로 정령위도 동이족임을 알 수 있다). 정령위는 새가 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새의 비유는 곧 날개 돋친 존재로 승천함을 나타낸다. 신선(神仙)은 삼차원세계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볼 때 새처럼 날개 돋친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 시구 중 마지막 구절 <하불학선총류류(何不學仙塚纍纍>)이다. 선도(仙道)를 배우지 않아 무덤이 즐비한 것을 보고 정령위는 탄식한다. 인간이 무덤을 남김은 비본래적인 생명현상이다. 선맥(僊脈)이 끊긴 이후 즉 노자가 말한 대도가 폐(廢)한 이후에 무덤이 생기게 되었다.
참 인간의 모습이란 시신을 자손에게 남기지 않고 무덤을 이 땅 위에 남기지 않는 것이다. 이 땅에서 장수하다가 선화(僊化)되어 우화등선할 때는 산(山)에 가서 산바람(嵐)에 육신은 순식간에 원소분해하여 해체시켜 버리고 변화되어 신선(神仙)이 되어 승천하는 것이 참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선(仙) 곧 산(山)사람이란 뜻은 산(山)에 가서 우화등선하기 때문이다.
한화대사전(漢和大辭典)에 「신선(神仙)은 山(산)에 들어가서 불로(不老) 불사(不死)의 술(術)을 배우는 자」라 했고 류원업보(類苑業寶)에 「늙고 죽지 아니하는 자를 선(仙)이라 칭하고 선(仙)은 산(山)에 입(入한다」라 함도 다 같은 뜻이 있는 것이다.
단군이 개교(開敎)한 선맥(僊脈)이 왜 동국(東國)에서 끊어졌고 또 선(仙)을 빙자한 도교의 외도(外道)가 왜 중국에서 꽃피고 다시 우리나라에 역수입되었는지 문헌과 사료가 없어 밝힐 길이 없다. 고운(孤雲)이 쓴 난랑비서(鸞郎碑序)에 보면 <설원지교선사(說敎之源備詳仙史)>라 한 구절로 보아 최치원이 살았던 시대까지 <선사(仙史)>에 대한 문서가 있을 듯하다. 그러나 지금은 <선사(仙史)>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도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 이제부터 풍류도에 대한 재고를 하면서 선맥(僊脈)을 다시 발굴해 보자. <저작권자 ⓒ CR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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