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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도 속에는 유불선 삼교뿐만 아니라 모든 고등종교의 비의가 다 내포

한밝 변찬린 | 기사입력 2024/11/21 [10:48]
변찬린의 ‘선고[僊(仙)攷’-風流道(풍류도)와 甑山思想(증산사상)

풍류도 속에는 유불선 삼교뿐만 아니라 모든 고등종교의 비의가 다 내포

변찬린의 ‘선고[僊(仙)攷’-風流道(풍류도)와 甑山思想(증산사상)

한밝 변찬린 | 입력 : 2024/11/21 [10:48]

기존 종교에 대한 회의와 비판 등이 제기 되고 무종교인들이 많아지는 가운데 기독교와 불교와 유교와 민족종교까지 포괄하는 새로운 종교관 제시한 변찬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본지에서는 한국종교사상가 한밝 변찬린시리즈 일환으로 변찬린의 사상을 더욱 깊이 알 수 있는 그의 글들을 다시 들춰내 연재한다.

우선 변찬린의 ()4회에 걸쳐 소개한다. 동서양의 종교경전을 통섭하여 '선맥과 영생'이란 관점에서 상호텍스트적 해석을 한 것으로 1979甑山思想硏究에 실렸던 논문이다.

이후 주역의 건괘와 예수의 일생을 비교종교학적인 측면에서 쓴 乾卦로 본 예수 小傳도 연재할 예정이다. 이는 한때 제자였던 김진희(1927-2016)의 유품에서 전문을 발굴하여 공개함으로써 학술 공공재로 활용한 것이다.

이어서 불교의 육신통을 재전유하여 예수의 도통과 비교하여 쓴 예수의 여섯가지 도통(道通)’도 연재할 예정이다. 이는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 에 실린 글이다. (편집자 주)

 

<연재순서>

1. 종교의 본질

2. [()의 본의

3. 풍류도(風流道)에 대한 재고찰

4. 풍류도에로의 회귀 원시반본(原始返本)

 

현대인은 유불선 삼교나 다른 종교에 지쳐있는 몸

 

선화[()]의 길은 너무 자취가 희미하여 말할 수가 없다. 옛 사람들은 그 길을 안듯한데 이제는 이끼에 덮히고 잡초만 무성하여 대도(大道)인 우화등선(羽化登仙)의 길은 자취를 알 길이 없다. 숲 속을 산보해 보면 유불선(儒佛仙)의 길은 오솔길 모양 사행(蛇行)하고 있고 그 길을 행하는 구도자들을 만날 수 있으나 대도인 선[()]의 길만은 찾을 길이 바이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본 고의 목적은 잃어버린 대도인 선()의 길을 복원하려 함이다. 그러나 선()에 대한 문헌이나 사료가 전무한 형태이므로 주관적인 직관이나 자각에 의하여 논술할 수 밖에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종교적인 진리는 한 개체의 뛰어난 직관혁과 자각이 전체 곧 세계심전의 광명이 되는 법이다.

 

()의 길은 인간 앞에 개명(開明)된 본래의 길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이 길을 상실한 후 제이의(第二義)적인 길인 유불선에 의지하여 영원한 세계로 향한 여로에 오르기 시작했다. 현대인은 유불선 삼교나 다른 종교에 지쳐있는 몸이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이 말은 피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이 임종때 남긴 유언이었다우리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영원을 향한 여로에 오르고 있는 우리들, 여수(旅愁)에 젖어 방사능 낙진이 내리는 잿빛 원자우(原子雨)를 맞으면서 걷고 있는 현대인들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여로에 지친 행자(行者)와 구도자들은 잠시 길가에 앉아 쉬면서 걸어온 길을 반성하고 앞에 갈 길을 조망하면서 자신이 의자한 종교의 자리가 참 이립(而立)할 자리인가를 성찰해 보자. 

 

종교의 본질-영원한 생명 곧 영생의 약속

 

종교의 본질은 무엇인가? 모든 고등종교가 우리에게 전해준 복음과 소식의 핵심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의 약속이었다. 인간의 생명은 죽음이라는 한계상황 속에 놓인 고뇌의 실존들이다. 이 비극의 고뇌의 실존들에게 참 종교는 영원한 생명의 차원이 있음을 소개하고 있다. 

 

▲ 조로아스터, 부다, 모세, 예수, 모하메트도 생명의 빛을 죽음의 심연을 향해 조사한 빛나는 혼들이었다. 그러나 진리의 빛인 고등종교는 동양의 심성에서 싹트고 있다, 서양의 지혜 속에서는 종교가 발생하지 않았다. 조로아스타교· 불교· 브라만교· 유대교· 유교· 도교· 마호메트교· 힌두교가 다 동양의 심성 속에서 정과(正果)를 맺고 있다.

 

죽음을 앞에 놓고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존재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소식을 전해준 맨 처음 사람은 조로아스터(Zoroaster)duTek. 원시의 황무지에서 허무의 한기를 떨면서 죽음의 독감에 앓고 있는 미개한 심전(心田)들에게 배화(拜火)의 햇불을 높이 들어 허무의 한기를 녹혀주고 불의 따뜻함으로 진리의 태양을 증거한 조로아스타는 원시광야의 어두운 밤에 빛나는 불빛이었다.

 

그 다음에 온 자가 부다(Buddha)였다. 모세(Moses)도 예수(Jesus)도 모하메트(Mohammad)도 그리고 크리슈나(Krishna)도 라마(Rama)도 영원한 생명의 빛을 죽음의 심연을 향해 조사한 빛나는 혼들이었다. 이들 빛들에 의하여 인간의 미개한 심전은 개간되고 무명에 젖은 소경들은 개안되기 시작했고 드디어 태양이 빛나는 하늘과 범천(梵天)과 도솔천과 여호와의 하늘은 개천(開天)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한가지 알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모든 진리의 빛인 고등종교는 동양의 심성에서 싹트고 있는 점이다, 서양의 지혜 속에서는 종교가 발생하지 않았다. 조로아스타교· 불교· 브라만교· 유대교· 유교· 도교· 마호메트교· 힌두교가 다 동양의 심성 속에서 정과(正果)를 맺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는 성서의 본질을 왜곡하여 서양화시킨 종교이다. 그러므로 성서=기독교의 등식은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성서가 동양의 심성속에서 씌여진 문서이므로 성서의 바른 해독법도 동양의 심성으로 이룩되어야 한다. 서구인들이 만들어 낸 기독교란 성서의 사상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교리임을 잊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생명의 본래적인 욕구는 영생이다. 그 어느 누구도 죽기를 희망하는 자 없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영원을 향한 존재로 창조하였지 죽음의 존재로 창조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죽음이 생겼는가? 이는 아담이 생명과를 따먹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먹었기 떄문에 죽임이 침입한 것이다.

 

따 먹으면 죽으리라.

이 말씀을 뒤집어 놓으면 따먹지 않으면 영생한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불교는 인간의 죽음이 무명에서 연가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죽음은 비본래적인 현상이다. 본래적으로 인간의 생명은 영원을 향햐 도약 비약하도록 창조 혹은 심조(心造)되었는데 지금 인간들은 비본래적인 현상인 죽음의 존재로 변신하여 절망의 심연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의 존재인 인간들은 절망의 심연 속에서 시지프스의 고행을 반복하면서 부조리한 생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T.S. 엘리오트는 장시 황무지를 쓸 무렵 그는 런던의 사무실에 앉아서 무수한 인간들이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행렬을 아침마다 출근하는 런던시민들의 행렬속에서 보았던 것이다. 인간들이 살겠다고 몸부름치면서 일상성 속에 빠져 생존의 격전장으로 출근하는 모습이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장사진으로 신인의 눈에 관조되었던 것이다.

 

모든 인간들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존재들이다. 이 죽음을 향해가고 있는 인간들에게 영원을 향한 소망을 주고 영생의 차원으로 고양하는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 모든 고등종교의 본질이다.

 

불교는 생사의 윤회바퀴에서 해탈한 영생의 차원을 니르바나(涅槃)의 세계라 했고 마음이 절대자유한 경지에서 소요하는 것을 장자는 무하유향(無何有鄕)이라 했다. 또 장자가 말한 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은 소요자재하게 노니는 기본이다. 성서는 영생의 차원을 하나님 나라의 개념으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노자는 다음과 같이 영생의 차원을 노래하고 있다.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허퉁빈 골처럼 영묘한 신처럼 도란 영원한 것이 이를 일러 그윽한 모성이라 한다. 이 모성의 문은 천지의 근원이라 면면히 있는 듯하여 쓰고 쓰되 힘들지 않으므로 지치는 일이 없다.

 

불사의 도와 일치되어 무위이화(無爲而化)의 덕()을 소유함으로써 인간의 생명은 영원한 차원으로 고양되는 것이다.

 

유교는 중용 종구(終句)를 통해 영원과 연결되는 마음의 차원을 上天之載 無聲無臭로 소개하고 있다. 시경은 이와같은 경지를 德輶如毛라 했다. 터럭보다 가벼운 덕을 소유한 인간이 되자면 일체의 사심과 욕심과 망심의 중량감에서 해탈된 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다. 마음과 정신과 영혼이 자유롭고 해탈된 경지는 기체와 같이 중량감에서 해탈될 때 비로소 하늘 차원으로 상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모든 고등종교에서 죽음에서 해방되는 영생의 차원을 약속하고 있지만 우리들은 여전히 죽어가고 있는 존재라는데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육신은 죽어 모혈(暮穴)속에 인봉되고 마음과 정신과 영혼만이 자유로히 하늘나라에 가고 열반에 들고 무하유향에 소요한다면 이것이 참 영생하는 경지일까? 인간은 영육(靈肉)이 쌍전(雙全)할 때 온전한 존재이므로 영생의 차원도 영육이 쌍전하여 비상해야 한다. 이 날까지 우리들은 인간이 죽으면 육신은 무덤에 묻히고 영혼만 하늘나라에 간다는 소식을 당연한 진리처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소식은 비본래적인 제2의적인 소식이다. 이 소식은 타락된 인간을 구제하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죽어서 영혼만이 천당 극락간다는 소식은 참 종교의 본질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의 본질문제를 다시 반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유불선 삼교 그리고 다른 고등종교에서 제기된 영생의 문제는 참 진리였는 가라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유불선과 기타 여러 고등종교는 비본래적이며 제2의적인 종교이지 본래적이며 제1의적인 종교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본래적인 종교의 도맥(道脈)이 상실될 때 나타난 종교가 유불선 기타 다른 고등종교였던 것이다. 모든 종교는 타락된 다음에 깨달은 종교이므로 이는 본래적인 자리가 아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으면 유불선과 같은 종교는 남상(濫觴)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 타락된 다음 무명의 자리 속에서 깨친 종교가유불선 기타 다른 고등 종교로 나타났던 것이다.

 

노자는 이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大道廢有仁義(대도폐유인의)」⁾라고……

 

이 말씀은 종교의 본질을 깊이 천착(穿鑿)하고 있는 명언이다. 유불선 이전에는 본래 <대도(대도)>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대도가 폐()해진 후 나타난 종교가 <인의(仁義)의 종교> 곧 유()이며 불()이며 선()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불선 기타 다른 고등종교는 대도의 일부분만 본 열교(裂敎)에 지나지 않는다.

 

대도는 본래적인 도이며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무명에 오염되기 전에 나타난 도이다. 이 대도를 타락과 무명으로 상실했으므로 한 단계 낮은 차원에서 나타난 종교가 유불선이었던 것이다. 유교도 불교도 도교도 대도의 자리에서 보면 인위적인 유위의 도인 것이다.

 

대도는 살아서 승천하는 종교, 죽은 다음 영혼을 승천시키는 종교가 아니다

 

그럼 본래적인 대도의 본질은 무엇인가?

 

대도는 우리에게 장생불사를 약속하고 있다. 대도는 곧 선[()]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믿고 있는 종교는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약속하고 있지 않다. 죽으면 영혼이 천당 극락간다고 약속하고 있을 뿐이다.

 

본래 대도는 장생불사(長生不死) 환골탈태(換骨奪胎) 천의무봉(天衣無縫) 우화등선(羽化登仙)의 종교이므로 사후의 죽어서 천당 극락을 약속하는 종교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대도는 살아서 승천하는 종교이지 죽은 다음 영혼을 승천시키는 종교가 아니다.

 

성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다.(누가복음 2038)

 

하나님은 죽은 영혼이나 모집하는 염라대왕이 아닌데 우리는 이 날까지 죽으면 영혼이 천당 가서 하나님을 뵙는다고 오신(誤信)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영육쌍전한 자의 하나님이지 육은 무덤에 묻고 영혼만 상대하는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본래 인간은 영육이 쌍전하여 영생의 차원에 비상하여 고양될 때는 선화[()되어 신선)이 되는 것이지 죽어서 영혼이 천당 극락가는 것이 아니다. [()]의 대도를 잃어버림으로써 죽어서 영혼이 천당 극락간다는 피안종교로 변질된 것이다.

 

우리는 인간 칠심고래희(七十古來稀)라 하지만 본래 인간의 수명은 나무처럼 장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내 백성의 수한(壽限)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구약 아사야서 6522)

 

이 성서의 말씀은 대도의 인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적인 인간은 이 땅에서 나무와 같이 장수하다가 죽어서 그 영혼만이 천당 극락가는 것이 아니고 산체로 선화(僊化)되어 우화등선하게 된 존재였다. 그러므로 대도의 마당에는 인간의 무덤이 없다. 무덤을 남기는 종교는 대도를 상실한 다음에 나타나는 종교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생각해 보라. 자연계에 생존하는 모든 동물들은 무덤이 없다. 아무리 미물일지라도 죽을 때 자신의 시체를 처리하고 죽는 지혜를 생래적으로 터득하고 있다. 파리도 참새도 다람쥐도 호랑이도 코끼리도 제 시신을 그 동족들에게 남기고 죽는 법이 없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뽐내는 인간들만 그 시신을 자손에게 남기고 그 자손들은 더러운 시신을 염()하고 곡()하고 장사(葬事)하고 있으니 이것이 인간의 참모습이겠는가?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대도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이 땅 위에서 무병장수(無病長壽)하다가 지혜가 백수(白首)가 되면 산에 가서 선화(僊化)될 때 그 육신은 산바람())결에 흩어 순식간에 원소분해하여 풍화(風化)시켜버리고 풍류체(風流體)가 되어 우화등선하여 귀천(歸天)하였을 것이다.

 

이 선()의 대도를 상실한 다음에 無明(무명)에 덮힌 인간은 시신을 처리할 지혜가 없게 되니 그 자손들에게 더럽고 냄새나고 추깃물이 흐르는 시신을 남겨놓고 영혼만 빠져나가 영계(靈界)에 가는 비본래적인 과정을 밟고있는 것이다. 무덤을 땅에 남기지 않고 시신을 자손에게 남기지 않는 길만이 본래적인 참종교의 본질이다.

 

그런데 동양에서 발생한 여러 고등종교를 분석해 보면 장생불사 환골탈태 천의무봉 우화등선의 비의를 알고 있는 백성은 동의족뿐이었다. 단군(檀君)이 장생불사하다가 신선(神仙)이 된 사실은 신화(神話)가 아닌 사실)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단군(檀君)은 아사달(阿斯達)에 들어가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다>라고 했다. 단군(檀君)이 대각(大覺)한 종교는 죽어서 그 영혼이 천당가는 죽은 자의 종교 즉 피안종교가 아니었다. 단군은 죽어서 그 영혼이 귀천한 것이 아니라 살아서 죽음이 없이 선화(僊化)된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참 종교는 피안종교가 아니다. 피안은 죽은 후 그 영혼이 천당 극락 생기는 마당()이다. 단군은 죽어서 저승(彼岸)에 간 것이 아니라 살아서 신선(神仙으로 변신되여 귀천했으므로 그 마당은 피안이 아니라 또 다른 <새 차원의 이승>인 것이다.

 

대도인 선()의 세계에는 피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새 차원의 피안만 존재할 뿐이다. 신선(神仙)이 되는 마당은 이승에 대한 저승이 아니라 이승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이승으로 고양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저승이란 죽은 자의 영혼이 가는 마당이다. 불사의 산 자들에게는 저승이란 비본래적인 장인 것이다.

 

삼일신고(三一神誥) 천궁훈(天宮訓)을 보자

 

天神國 有天宮 階萬善 門萬德 一神攸居 羣靈諸喆護侍 大吉祥 大光明處 惟性通功完者 朝永得快樂( 三一神誥 天宮訓)

(한울은 한울의 나라이다. 한울집이 있어서 온갓 착함으로 섬돌하며 온갖 고이로 문하니 한얼께서 계시는데요 여러 영들과 선관들이 뫼셨나니 크게 좋으며 크게 빛난 곳이라. 오직 성품이 통하고 공적을 마춘 자라야 한얼을 뵙고 길이 쾌락을 얻으리라.)

 

이 천궁훈 중에서 하늘나라에 갈 자는 유성통공완자(維性通功完者) 즉 성품을 바르게 닦고 공적을 다 완성한 자가 간다고 했다. 유성통공완자는 죽어서 육신을 무덤 속에 묻고 영혼이 천궁(天宮)에 가는 것이 아니라 단군처럼 우화등선한 자 아니면 천궁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단군은 무덤을 남기지 않았다. 우화등선한 존재이므로 무덤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 단군은 피안으로 열반한 것이 아니라 <새 이승>인 영원한 차원으로 도약 비상한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단군이 대각(大覺)한 풍류도(風流道)도 새로운 관점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오늘날 풍류도를 화랑도(花郞道)와 혼동하고 있는 것이 일부 학자들의 오류이다. 풍류도의 일부분이 화랑도로 화하여 꽃핀 것은 사실이지만 풍류도=화랑도가 아닌 것이다. 화랑도는 대도인 풍류도가 폐()한 연후에 나타난 한 아류(亞流)에 지나지 않는다.

 

풍류도의 본질은 선(이다. 선맥(僊脈인 풍류도는 대도이다. 대도 속에는 유불선의 분립된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니 불()이니 도(니 하는 열교의 개념은 풍류도가 맥이 끊어진 이후에 나타난 비본래적이고 제2의적인 개념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미 풍류도 속에는 유불선 삼교뿐만 아니라 모든 고등종교의 비의가 다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의 그릇에 불교를 담을 수 없고 불()의 그릇에 유교나 도교)를 담을 수 없지만 풍류도의 신기(神器) 속에는 모든 종교가 담겨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풍류도는 천하의 신기(神器)이다. 대기(大器)이다.

 

증산(甑山)이 새 시대를 개벽하면서 유불선 삼교를 극복한다고 대언(大言)한것도 증산의 마음자리가 대기(大器)인 풍류도의 자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이제부터 선()과 풍류도의 관계를 고찰함으로 잃어버린 대도를 복원하는 작업을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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