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통, 요통이 진정되는가 싶더니 지병인 메니에르병으로 인한 어지럼증이 재발됐다. 이명증과 함께 시속 1660km의 지구 자전이 느껴지는 듯한 혼돈의 고통이 찾아온다. 잠깐의 고통은 곧 나아지리라는 기대 때문에 감당할 수 있지만 어지럼증이 계속 이어진다면 어쩔 것인가? 차라리 죽음이 편안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더욱이 말기암 등으로 몰핀이나 그보다 50배 강력한 펜타닐으로도 아픔을 진정시키지 못하며 죽음만 기다리는 주변 사람들을 대하면 편안한 죽음 ‘안락사’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안락사 찬성 82%…평온한 죽음 선택권리인가? 생명경시 조장인가?
그러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특히 안락사 죽음은 윤리적, 밥적, 종교적 제약이 있다. 아픔 없이 존엄하게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생명 존증을 중시하는 제약에 부닥친다.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82.32%가 안락사를 찬성했다. 찬성하는 이유로는 ‘평온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에’가 73.19%로 가장 높았다. 이어 ‘불치병 환자 등 안락사를 원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18.13%, ‘고령화에 따른 질병, 간병, 비용 등의 사회문제에서 현실적 대안 중 하나이기 때문에’ 8.28% 순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안락사 반대자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생명경시문화 조장을 비롯해 환자의 자기결정권 침해와 경제적 이유의 남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합법화될 경우, 장기매매와 같은 불법 행위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천주교에서는 안락사(조력 자살. 조력 존엄사)를 ‘조력살인’이라 표현하기도 하고 호스피스환자 중 죽고싶을 정도의 심한 통증을 겪는 사람은 15%에 지나지 않는다는 통계도 제시한다.
이러한 찬반 논란 때문에 스위스를 비롯해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 안락사가 합법화되어 가는 세계 풍조에서도 최근 안락사 캡슐(Sarco.사르코)의 사용이 중단됐다. 올해 7월에 처음 공개된 'Sarco'는 단돈 18스위스프랑(약 2만 8천 원)을 내면 영원한 잠을 잘 수 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이목을 끌었다. 사람 한 명이 누울 정도의 크기로 뚜껑을 닫고 버튼을 누르면 질소가 뿜어져 나와 약 5분 안에 질식해서 생을 마감할 수 있다. 지난 9월 면역 질환을 앓았던 미국인 64세 여성이 스위스 메리스 하우젠의 숲속에서 이를 처음 이용했다. 그런데 이것이 법적 문제로 대두되어 중단되었다. 대기 명단에 있던 371명도 진행하지 않는다.
‘나도 고독사 걱정’ 96%…지옥과 같은 고립과 외로운 삶과 죽음 천국같은 편안한 죽음을 논하는 안락사가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가 하면 지옥같은 삶과 죽음을 말해주는 고독사도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국내 1인 가구 수가 .전체 가구의 35.5%에 달하는 가운데 노인층 뿐 만 아니라 젊은 층에서도 고단한 삶을 살다가 고독사하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어났다.
지난해 우리나라 고독사도 3600명을 넘어섰다. 통계상으로만 나타난 수치이다. 나와 같은 부부 2인 가구가 아직은 주변에 자식과 친지가 있어 고독사를 면할 수 있지만 세월 조금 지나면 바로 이웃들과 내가 맞이할 죽음이다. ‘안락사’란 마지막 호강은 점점 멀어져 갈 것이다.
한국리서치가 최근 고독사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 10명 중 6명(61%)은 ‘언젠가 나도 고독사를 할 수 있다’는 데 동의했다. 또 응답자의 35%는 ‘나는 요즘 고독사를 할까 봐 걱정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전체의 96%가 고독사를 두려워 한다는 통계이다. 이들이 겪을 고립과 외로운 삶은 죽음만큼이나. 지옥과 같은 끔찍한 것이다.
『서경』 「홍범」편에는 인간의 오복(五福)을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라 했다. 죽음도 삶의 마지막 과정으로 보고 천명대로 살다가 죽을 때 편안히 돌아가는 것을 큰 복으로 여긴 것이다. 안락사와 고독사가 대두되는 것을 보면 고종명은 더욱 힘들어진 복이 된 듯 하다. 자신이 살던 집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 즐거운 여행과 소풍이어서 행복했다”며 마지막 인사하는 고종명은 정녕 상상 속의 천국인가.
죽음만큼 두려운 ‘사후의 운명’- 나만은 천국행 티겟을 갖겠다는 욕심
안락사와 고독사 등 죽음을 거론하는 것도 벅찬데 ‘죽음 이후의 운명’에 대해서도 두려워하는 게 사람이다.
단테는 사후에 갈 지옥 8단계, 연옥 7단계, 천국 10단계로 상세하게 구분해 놓았다. 불교에서는 지옥 만도 ‘팔열지옥(八熱地獄)’과 ‘팔한지옥(八寒地獄)’으로 나누고 관문마다의 여러 지옥들을 복잡하게 구성해 놓았다. 여러 종교들도 이와 다를 바 없는 다양한 천국과 지옥을 제시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천당으로 선택받기 위해 면죄부를 사서 구원받고, 시주금을 내고 지옥에서 구제받는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으로 면죄부 비판 성명을 냈고 그에서 파생된 일부 프로테스탄트가 ‘지옥 폐지’를 선언했지만 자신만은 천국행 티겟을 갖겠다는 욕심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대우주 자연과 하나님이 사람을 보기엔 각종 종교, 이념, 선악, 정의·불의 등 행실이 모두 ‘오십보백보’ 비슷한 것일텐데 시대적, 지역별 환경에 따른 자신들의 확신으로 허구세계를 구비해 놓았다. 확신하는 고집은 다른 신념들을 무시하고 독선이 되는데 천국행, 지옥행의 기준도 제각각으로 주장한다.
교회에서 거듭 설교하는 제목 중에 ‘부자와 나사로의 삶과 죽음’(누가복음 16:19~26)이란 것이 있다.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도 익숙해진 위로와 위안의 말씀이다.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았던 부자는 지옥 불꽃에 들어가고 고난을 받았던 나사로는 천국에서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과장된 비교겠으나 이 말씀에 따르면 자신의 안락사를 추구하느라 힘겨운 삶의 고독사를 외면하고 비싼 돈 들여 안락사가 합법화된 나라와 지역이나 스위스의 안락사 지원 전문병원 디그니타스 등을 찾아 안락사하는 사람들은 지옥가고, 고통받은 고독사자들은 천당에 든다는 이야기다. 저 높은 곳에서는 안락사, 고독사 그리고 그들의 선악, 미추(美醜)와 지역과 환경에 따른 옳고 그름에 대한 신념과 이념 등 모든 것을 다 구분않고 연민으로 받아들일 것인데 말이다.
행복한 삶과 죽음 제시한 헨리 미사의 ‘참 괜찮은 죽음’과 다이언 램의 ‘내가 때가 오면’
금기시 되었던 죽음 문제에 대한 논의가 근래 각종 연구와 모임, 책 등으로 활발히 이루어지는 가운데 핸리 마시의 ‘참 괜찮은 죽음(do no harm)’과 다이안 램의 ‘나의 때가 오면(When mytime comes): 존엄사에 대한 스물세 번의 대화’가 눈에 띄었다. 두 책은 다양한 죽음을 목격하고 경험하면서 죽음을 극복할 적으로 보지 않고 삶과 떼어낼 수 없는 짝으로 규정하며 ‘좋은 삶’과 ‘좋은 죽음’을 이야기해 놓았다. 비록 사후의 전국, 지옥 이야기를 거론하지 않았지만 바로 사후의 천국이야기를 들여주는 듯했다.
‘참 괜찮은 죽음’은 영국의 저명한 외과의사인 저자가 30년에 걸쳐 경험한 뇌수술로 목숨을 건진 사람, 세상을 떠나는 사람,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 25편을 담았다. 누구나 한 번은 맞이하는 죽음을 괜찮다고 느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모색하게 한다. 핸리 마시는 존엄사에 대해서 확고한 주장을 내세우지 않았다. “존엄을 해치는 치료를 중단하는 것이 최선일 수도 있고 가망이 없어도 수술로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는 것이 최선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각자의 마음속 답을 따르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괜찮은 죽음’에 대해선 이렇게 피력했다.
“내가 죽는다면 나는 심장마비나 뇌졸중으로 기왕이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그런 복은 쉽게오지 않으리란 것을 걸 잘 안다”며 자신의 어머니는 교회에 다니며 마지막 복을 누렸다고 했다. 자신은 신앙이 없지만 순간적인 죽음을 끝내 이루지 못한다면 어머니가 마지막 순간에 남겼던 말을 자신도 남기고 싶다고 했다. “멋진 삶이었어. 우리는 할 일을 다했어”
‘나의 때가 오면’은 미국의 유명 방송인이자 존엄사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존엄사 전문가인 저자가 말기 환자, 가족, 의사와 간호사, 종교 지도자, 입법가 등 23명과 존엄사 관련 인터뷰를 했다. 다이언 램 자신은 ‘죽을 권리에 대한 논쟁에서 가장 저명하고 핵심적인 인물’로 평가받지만 이 책에서는 균형잡힌 방송인 답게 일방적 주장만을 전달하지 않는다. 존엄사가 아직 답변하지 못한 문제 역시 많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존엄사 반대자인 종교인과 의료인과 대화를 나눌 때 그들 역시 그 누구보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존중한다.
그러나 23번 째 인터뷰 대상자로서 자신의 손자와 대화하면서 ’존엄사가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권리‘임을 강조해 놓았다. 그러면서 다음의 유언같은 말로 책의 대미를 장식했다.
”나는 너희 엄마랑 아빠, 데이브 삼촌이랑 낸시 숙모. 존 모드가 이 인터뷰 영상을 가지고 있으면 좋겠어. 슬프다고 생각하면 안돼. 나는 이 모든게 삶의 일부라는 생각을 늘 하거든. 너희 할아버지가 그랬어. ’난 다음 여행이 너무 기다려져. 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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