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세상을 이겨낼 수 있는 처세와 지략을 담은 글을 쓰고 있어요. 인간사 얽매이지 않고 붓이 이끄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소설, 수필이나 에세이 형식의 잡감문(雜感文)을 쓰고 있지요. 세상에는 불행한 사람이 참 많이 생겼어요. 그들의 슬픈 눈동자를 치유하고 용기를 주는 것이 제가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불확실한 현실을 헤매며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글로 그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싶어요. 그들이 잡은 손이 아무리 아파도 절대 놓지 않을 겁니다.」
“중류(中流) 생활에서 갑자기 하층(下層) 인생으로 전락” 루쉰의 할아버지는 청나라 중앙 관리였다. 그러니까 1893년 루쉰이 13살 때 일어난 사건이다. 나라에서 과거시험을 보았는데 할아버지는 부정행위에 가담한 것이 밝혀져서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루쉰은 어릴 적부터 살아온 고택에 있는 생활 용품을 4년 남짓 팔아가며 생계를 유지했다. 수시로 소흥에 있는 전당포를 드나들었다. 약방 계산대는 어린 루쉰의 키보다 높았다. 까치발을 하고 가족들이 입던 옷이나 장식용품 따위를 들이밀고 전당포 주인이 내주는 돈을 애써 외면하며 받곤 했다. 그리고 약방 계산대에 가서 오랫동안 몸져 누워있는 아버지의 약을 지었다.
집에 돌아오면 또 집안 살림을 살피느라 정신없이 움직여야 했다. 처방을 내려준 약재는 약탕기에 넣고 정성들여 다려야 한다. 약재는 식물 뿌리나 곤충 말린 것, 나무 열매 등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예를 들면 겨울에 뽑은 갈대 뿌리, 삼 년 동안 서리 맞은 사탕수수, 교미중인 귀뚜라미, 열매 달린 평지목 등 어린 루쉰이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약재는 전혀 효험이 없었다. 아버지는 결국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때서야 루쉰은 의원이 속임수를 부려 지어낸 약 처방임을 알았다.
그런 시련을 겪으면서 루쉰은 세상 사람들 중에는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 힘이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 학식이 없는 사람을 무시하며 속이는 비정한 인간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루쉰이 기억하는 이런 의술은 결국 속임수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그러면서 이런 악행에 속아 넘어간 많은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깊은 동정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는 번역된 역사책을 통하여 일본의 유신(維新)은 서양 의학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의 어느 조그만 시골마을에 있는 센다이 의학 전문학교 입학을 생각하였다. 서양 의학을 배워 그들의 삶에 희망을 주고 생명을 연장 시켜 줄 수 있다면 이 배움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
루쉰은 서양 의학을 배워서 병으로 고통 받는 많은 중국인을 소생시켜야겠다는 일념으로 일본 센다이 의학 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런데 의사 지망생인 루쉰이 문학으로 돌아선 계기가 일어난다.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벌이던 시기이다. 수업 이 끝나갈 무렵 슬라이드 필름 속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다. 일본 군인이 중국인을 총살하는 장면이다. 이 사건은 만주에서 중국인이 러시아에 정보를 흘리며 밀정 노릇을 했는데 일본 군인에게 잡혀 처형을 당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많은 중국인이 구경꾼의 자세로 방관자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여기서 루쉰은 큰 충격을 받는다. 동족이 처절한 아픔을 당해도 구경만 하는 중국인의 정신을 바꾸지 않으면 중국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인들이 자신만 지키는 이기주의 정신을 뿌리 뽑아야 한다. 그는 몸을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문학의 힘으로 중국인의 정신을 고치는 선구자의 길로 들어선다.
루쉰은 ‘고향’이란 소설에서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에 있는 길과 같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고 했다. ‘희망아! 그런데 왜! 이리 세상은 적막할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인생에서 행복의 길을 찾지 못한다면 희망도 절망과 마찬가지가 아닐까싶다. 그래서 절망에는 저항해야 한다고 말한다. 앞에 산처럼 큰 장애물이 있는 줄 알면서도 기어이 올라가는 저력. 그게 절망에 저항하는 자세이다. 그러기에 절망적일 때 희망은 힘이 솟아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인생에 있어 희망이 없다면 ‘삶’이라는 수레에 자신의 죽은 시체와 같은 절망을 넣고 끌고 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루쉰의 초상화에는 어질고도 굳건한 양심의 그림자와 침묵 속에 민중을 생각하는 정기 어린 안색으로 자신을 탐색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민중을 진정으로 위했기에 그들의 정신을 깨우치기 위해 전신을 까맣게 불태우며 소설과 잡감문을 남겼다. 그가 중국의 광활한 자연과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빚어낸 문학에는 거대한 대륙적 포용력과 강한 인성을 기르게 만들었다. 그가 세속과 풍진에 시달리면서도 한결같은 품성을 갖춘 것은 부단한 정신 수양과 글로 자기 연마를 한 덕분이리라. 루쉰은 글이라는 한 점 불꽃을 소중하게 활화산처럼 키워 인간이 올바르게 지켜야 할 철학과 통찰력을 소설에 깔았다. 그러한 고전은 그릇에 담긴 물이 아니라 흐르는 강물처럼 끊임없이 변화하여 세계인 가슴속에 절절한 희망을 불어 넣고 있다.
“희망의 구름다리”
사람과 사람 사이 강 하나가 흐르네 투명해서 속내가 훤히 보여 진흙탕이 되어 막막하지만
얼마나 깊은지 어디로 흘러가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강물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닮았네
이 사람 저 사람 마음이 부대끼고 아껴주면서 그렇게 사는 동안
서로의 사이 가로질러 흐르는 강물에는 희망의 구름다리가 놓여 서로의 마음이 훤히 보이네 (박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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