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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선 작가, 루쉰의 낙원 ‘백초원’ (1)

박현선 | 기사입력 2024/10/20 [08:27]

박현선 작가, 루쉰의 낙원 ‘백초원’ (1)

박현선 | 입력 : 2024/10/20 [08:27]

▲ 루쉰(1881-1936) 근현대 중국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민족의 영혼으 로 칭함. 소설 33편 중에는 중편인 ‘아Q정전’ 1편, 단편 32편, 나머 지는 전부 잡감문인 수필이나 에세이를 씀.     ©CRS NEWS

 

민중의 혼이 된 루쉰의 바람

 

허술한 집에 살고

누더기 옷을 입으며

굶주린 배를 쓸어안고

이곳저곳을 방황하기 위해

,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소설을 창작 한 것은

풀뿌리 민중을 구원하기 위한

희망이 담겨있어요.

자신이 변하지 않고서는 세상사는

진리를 제대로 깨달을 수 없어요.

여름 매미에게 겨울 이야기를 할 수 없듯이

어장 물고기에게 바다 얘기를 할 수 없지요.

, 까막눈인 민중에게 혁명을 이야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결단하고, 민중에게 바라는 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고전(古典)을 통해 역사 속으로 들어가

배우고 익힘에 충실해야 합니다

▲ 백초원’ 루쉰이 유복한 삶을 살 때, 밭과 어우러진 큰 뜰에서  동무들과 즐겁게 지내던 장소 © CRS NEWS

 

소흥에 있는 노신 옛 거리를 걷고 있다. 루쉰(노신)의 역사와 인간에 바친 고귀한 삶에 매료된 사람들이 빽빽하다. 미어터질 듯한 사람의 물결. 그 숨결들은 루쉰이 살던 옛 고택이 빚어내는 깊고 깊은 1894년 봉건시대로 들어가 영혼이 정화되는 시간을 맛보기 위해서다.

높은 벽안에는 유구한 세월을 말해주듯 노송이 지키고 있다. 자연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유해한 건축 자재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고스란히 그의 유년시절로 빠져든다.

▲ 옛집에 있는 덕수당(德壽堂)은 루쉰 가족이 방문 손님을 접대하고 혼례와 장례 제사를 치르던 곳  © CRS  NEWS

 

,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의사가 되고 싶어. 우리 집은 가난하고 수십 명의 식솔들이 장남인

나를 의지하며 살고 있지. 아버지도 아프시니 대신 집안일을 도와야 해!“

▲ 샤오싱 루쉰기념관에 있는 루쉰 부모님 사진  © CRS NEWS

 

푸르른 채소밭은 생기가 넘치고 잎사귀가 반짝이는 초목이 높다랗게 솟아있는 정원에 도착했다. 아직 청나라의 정령과 생명이 스며있는 듯한 예스런 기분이 들었다. 잘 생긴 바위덩이도 보인다. 가운데는 백초원(百草圓)이라고 한자로 쓰여 있다. 반질반질하게 잘 닦여진 우물도 자그마하게 만들어져 있다. 어린 루쉰은 여기 풀숲에 날아다니는 종달새 울음소리를 들었다. 채소밭에서 꿀벌들이 꽃가루를 채취하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곤충들을 손바닥에 놓고 관찰하며 놀기도 했다. 가을에는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어린 루쉰을 짓누르는 우울한 그림자를 떨치곤 했다. 특별한 재미가 있거나 다양한 흥밋거리로 가득한 곳은 아니다. 그러나 아련하고 애틋한 정취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유년시절 그에겐 이 곳이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최고의 낙원이지 않았을까.

▲ 옛집에 있는 당시 부엌 전경  © CRS NEWS

 

백초원 뜰을 바라보며 잘 정돈된 책상 앞에 앉아 먹을 갈고 글을 쓰며 문인의 꿈을 키웠다. 그에게 글을 쓰는 것은 정신의 안식처가 되었고 기쁨을 가져다주는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먹의 맑은 향기가 방안에 잠잠히 서리면 흩어졌던 정신은 저절로 가다듬어졌으리라.

루쉰은 기억력이 좋은 데다 노력하는 아이였다. 무슨 일이든 성심을 다하는 성실함까지 지녔고 글을 쓰는데 탁월한 재능을 타고 났다. 어릴 때부터 모험심이 돋보이는 중국의 고전 서유기를 좋아했고 산해경이나 다소 외설스럽기도 한 금병매도 즐겨 읽었다고 한다. 루쉰은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혼자서 문리(文理)를 깨우치고 우주 만상의 이치를 자연현상에서 보고 배워나갔다.

▲ 샤오싱 루쉰기념관에 소장된 서적  © CRS NEWS

 

이 집에서는 루쉰의 식구뿐만 아니라 친척에 이르는 사람들까지 수십 명이 살았다고 한다. 할머니는 우아한 서양식 침실에서 자기 전에는 늘 어린 루쉰에게 민간이야기나 전설이 담긴 책을 읽어 주었다. “고양이는 호랑이의 스승”, “물이 금산을 잠그다등의 우화는 루쉰의 상상력을 더욱 더 깊게 만들었다. 그의 작품 중 토끼와 고양이’, ‘오리의 희극등은 허구가 아닌 실제 체험을 소설로 쓴 것이다.

▲ 루쉰공원 (루쉰기념관) 전시된 생전(生前) 모습  © CRS NEWS

 

어머니의 침실은 북쪽을 향한 큰 침대가 인상적이다. 그녀는 학교를 다닌 적은 없지만 독학으로 책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갖추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여기서 책을 읽고 바느질로 직접 생활용품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부엌은 명문가에서 유복하게 자랐다는 사실을 엿볼 수가 있었다. 부뚜막에는 수십 명의 밥을 지을 수 있는 무쇠 솥이 부유했던 집안 살림을 보여주고 있다. 찬장, 사방탁자와 솥뚜껑은 목공 가구의 소박한 단순미는 부엌의 동선과 조화를 이뤄 온화한 기운이 느껴진다.

▲ 루쉰공원 (루쉰기념관) 전시된 루쉰 활동 모습  © CRS NEWS

 

아쉽게도 옥의 티라고 하면 루쉰의 대가족 중에 유독 아편 중독자가 많았다는 점이다. 루쉰의 아버지도 중독자였다. 게다가 일족 중에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거나 망상적인 성격으로 이유 없이 남을 공격하는 성격파탄자가 끼어 있었다. 훗날 루쉰은 소설 속에서 여러 주인공의 모습으로 등장시켜 특이한 인간상으로 변화시켰다.

루쉰의 청소년 시절은 가족의 잔혹사로 점점 기울어갔고 쌓여가는 걱정에 날마다 공포와 슬픔에 젖어 눈물로 지세우기도 하면서 혹시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를 믿어주던 어머니가 위로의 말을 전할 때는 희망으로 가득하다가도 현실은 땟거리 걱정을 해야 하니 세상이 무너질 거 같은 절망감도 있었다. 그래도 괴롭고 힘들었던 순간마다 지탱해준 든든한 버팀목은 가족이 믿어주는 사랑의 빛이었다. 슬픔과 고통을 떨쳐내려고 생각했던 일상들을 매일 일기로 기록하였다. 그렇게 습관을 들인 글쓰기는 시간의 무게를 이기고 다듬어져 민중의 정신을 일깨우는 소설을 써 내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고택은 루신이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기억과 집안의 몰락의 길을 걸어온 내력을 생생하게 기억하며 고고하게 서 있다. 1919년 말 루쉰은 대가족을 데리고 북쪽으로 이주를 하면서 샤오싱에 있는 고향과 작별을 했다. 그 후 주가신대문(周家新臺門) 고택의 대부분은 다른 이가 허물어 새로 지었지만 고택 주요 부분인 두 건물과 두 기둥 및 부엌은 다행히 보존되어 건국 후 보수를 하여 루쉰의 향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옛 정기를 느끼게 하는 생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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