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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불교의 서막, 돈황과 하서회랑

보검 스님 | 기사입력 2024/09/30 [08:43]
석굴사원과 문헌, 돈황학 성립

중국 불교의 서막, 돈황과 하서회랑

석굴사원과 문헌, 돈황학 성립

보검 스님 | 입력 : 2024/09/30 [08:43]

종횡무진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92)

 

오늘날 한국불교는 인도불교 전통과는 너무나 거리감이 있다. 인도불교와 한국불교는 전연 다른 종교나 종파 같은 느낌이 든다. 인도 아대륙에서 인도 서북과 중앙아시아 서역을 경유해 오면서 인도원형 불교는 내용적으로나 외양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지금의 한국불교는 인도형 불교라기보다는 중국형 대승불교의 선종 전통이 휩쓸고 있다고 하겠다. 

 

▲ 돈황 막고굴 사원.  © CRS NEWS

 

이제 우리는 왜 한국불교가 중국식 대승불교의 선종(禪宗)인가?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중국불교의 서막부터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사실 중국에 불교가 전파된 이후, 적어도 5백 년 이상 이후에 선종불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지만, 선종불교의 선명한 모습은 송()대에 와서야 확연해진다. 현재 한국불교는 송대의 선종불교 전통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차후에 이 문제는 더 천착하기로 하고 일단은 중국에 불교가 전파된 과정을 추적해 보자. 

 

▲ 초승달 모양의 월아천(月牙泉).  © CRS NEWS

 

지금 종횡무진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시리즈는 사막지대인 오아시스 불교를 지나서 중국의 관문인 돈황에 이르렀다. 돈황을 지나면 하서회랑이 있는데, 지금은 티베트 불교와 중국불교가 공존하고 있다. 돈황불교는 중국에 불교가 전파된 이후에 전성을 이루게 되었지만, 잠깐 일별하고 중국내륙으로 진입하고자 한다.

 

현재 돈황(둔황)은 중국 서부 간쑤성 북서부에 있는 현급시이다. 몇 년 전 중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이 도시의 인구는 30만 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둔황은 고대 실크로드의 주요 정거장이었으며 인근 막고굴 불교석굴 사원은 너무나 유명하다.

 

둔황은 초승달 호수와 명사산(鳴沙山, ‘노래하는 모래산을 의미함)이 있는 오아시스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는 모래 언덕을 휘젓는 바람 소리, 즉 노래하는 모래 현상에서 이름을 따왔다. 둔황은 고대 남부 실크 루트와 인도에서 티벳 라싸를 거쳐 몽골과 남부 시베리아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의 교차로에서 전략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둔황의 중심부로 곧장 이어지는 좁은 하서(허시)회랑의 입구를 통제한다. 중국 북부 평야와 고대 수도인 장안(오늘날 시안)과 뤄양(낙양)으로 향하게 된다.

 

둔황 지역에는 강족(羌族)이 기원전 2,000년경에 이 지역에 거주했다는 증거가 있는데, 아마도 중국 역사상 강족으로 기록된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 티베트-버마 계통의 강족.  © CRS NEWS

  

강족은 고대 중국의 다양한 시기에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에게 붙여진 이름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티베트-버마 출신으로 생각된다. (), (), () 왕조의 탕구트족은 강족 출신일 수 있다. 현대의 강족과 티베트인 역시 부분적으로는 고대 강족의 후손일 수 있다.

 

좌전(左傳)후한서에 따르면 둔황 지역은 멜론 생산으로 유명한 고대 과주의 일부였다. 사기(史記)에도 월지의 고향과 관련하여 그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 한나라 무제가 외교관 장건을 중앙아시아로 파견하는 모습. 막고굴 벽화, 8세기 작품.  © CRS NEWS

 

전국시대 둔황의 주민에는 대월지족, 오손족, 스키타이인족인이 있었으며, 대월지족이 강해지면서 강 부족을 흡수했다. 기원전 3세기에 이 지역은 흉노의 지배를 받게 되었지만, 기원전 121년 무제가 흉노를 격파한 후 한 왕조 시대에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둔황은 흉노를 격파한 후, 무제가 세운 4개 변방 수비대 도시 중 하나였으며, 중국은 둔황에 요새를 건설하고 정착민을 그곳으로 보냈다. ‘타오르는 봉화를 의미하는 둔황이라는 이름은 약탈하는 유목민의 공격을 경고하기 위해 켜진 봉화를 의미한다. 둔황군은 아마도 기원전 104년 직후에 설립되었을 것이다. 남북 실크로드의 역사적인 교차점 근처 하서(허시) 회랑의 서쪽 끝에 위치한 둔황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만리장성은 둔황까지 확장되었고, 요새화된 봉화대가 서쪽으로 사막까지 뻗어 있었다. 서기 2세기 무렵 둔황의 인구는 76,000명이 넘었고 도시를 통과하는 대상들의 주요 공급 기지였다.

 

물과 식량을 싣고 사막을 횡단하는 힘든 여행을 떠났고, 서쪽에서 도착하는 사람들은 둔황 성벽의 신기루 같은 광경을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는데, 이는 둔황이 교통의 흐름 속에서도 안전과 편안함을 의미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둔황 지역 최초의 불교 석굴은 353년에 만들어졌다.

 

▲ 둔황에 있는 한 왕조(기원전 202년~서기 220년)의 다진 흙으로 만든 중국 망루 유적.  © CRS NEWS

 

둔황은 서기 500년에서 1,000년 사이에 중요한 불교 중심지였으며 수많은 수도원이 있었다. 중국, 인도, 티베트 출신의 순례자들이 이곳과 인근 막고굴에서 만났다. 이곳에는 현존하는 불교 예술품과 문헌 자료가 많이 남아 있어 중국의 불교 공동체와 공동 불교 공동체와의 상호 작용에 대한 가장 자세한 정보 소스가 된다.

▲ 프랑스의 문헌학자, 언어학자, 중국학자, 티베트학자, 고고학자, 역사가, 탐험가 및 전문가인 폴 펠리오가 돈황사본을 조사하고 있다.  © CRS NEWS

 

돈황학은 1900년 중국 감숙성 둔황현 교외의 막고굴에서 둔황문헌의 발견을 계기로 탄생한 학문영역이며 동양학의 한 분야이다. 둔황 연구, 둔황 톨판학 등과 동의어이다. 그 중심은 둔황문헌의 문헌학적인 연구이지만, 거기에 부수하여, 막고굴의 불교 벽화나 불교 조각의 불교 미술사적 연구, 동석굴의 고고학적 연구, 톨판 연구 전반도 포함한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 돈황시의 시장 풍경.  © CRS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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