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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지사지(易地思之)’와 ‘내로남불’의 공존

신민형 | 기사입력 2026/04/27 [08:00]
생존본능 ‘내로남불’은 활력소, 역지사지는 정화(淨化) 역할

‘역지사지(易地思之)’와 ‘내로남불’의 공존

생존본능 ‘내로남불’은 활력소, 역지사지는 정화(淨化) 역할

신민형 | 입력 : 2026/04/27 [08:00]

개인이나 정치, 사회, 국가를 막론하고 역지사지(易地思之)란 교훈은 동서고금 어느 때나 어디서나 회자되었고 현재도 황금율, 금언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만큼 실천하기 어려운 교훈이기 때문이다. 남이 할 때는 역지사지를 강조하지만 그 행위를 자신이 할 때는 내로남불이 된다. 그러나 내로남불이 판쳐도 역시사지가 존재함으로써 삶과 세상은 정화되고 잘 돌아간다,

 

생존 본능은 역사 이래 인간과 세상의 진화, 발전을 향한 활력소였다. 자연과 동물, 그리고 먹이 경쟁자를 물리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었다. 그런가운데서도 공감 능력, 측은지심 등의 선한 본성이 잠재되어 있어 도덕과 윤리를 고안했고 생존본능의 내로남불을 순화시키려 했다. 먼 옛날 부족공동체가 그러했고 이후 종교, 사회, 국가도 역지사지 하자는 뜻으로 형성되었다. 

 

▲ 내로남불과 역지사지를 긍정적 시각으로 보는 제미나이 생성 이미자. 내로남불이 이중적인 태도를 비판하는 의미로 쓰이지만 모순적 행동이 오히려 활력소가 될 수 있으며 내로남불의 행태를 깨달으며 역지사지하는 포용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역지사지에는 한계가 있다. 내가 아무리 남의 입장을 고려해 너그럽게 생각하고 행동한다해도 그 안에 내로남불이 도사리고 있다. 상대방을 바라보며 내 편견이나 욕심을 깨닫는 완벽한 공감은 불가능하다. 내가 자라온 환경과 교육, 내가 살아온 사회와 국가.민족, 내가 읽은 책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며 그로인해 켜켜이 쌓인 나의 뿌리깊은 인식을 벗어날 수 없다. 또한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적 편향을 갖기 마련이다. 나의 편향된 신념과 이념이 종교보다 깊이 자리잡은 상태에서 각기 다른 성향들을 역지사지하자며 포용하는 척 하지만 내 속에 있는 거부감을 부정할 수 없다. 아예 나와 상대의 내로남불을 인정하며 화합을 위해 노력하는게 최상의 방법이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종교, 국가 사이에서의 역지사지는 더욱 힘들다. 애초 사람들의 삶에서 역지사지를 일깨우기 위해 만든 이들 공동체의 도덕과 윤리, 법이지만 그 세력이 커지고 권력화 됨에 따라 도덕과 윤리, 법 위에 군림한다.

 

공동체 삶을 평화롭게 하자고 만들어진 종교와 국가는 인간의 생존본능과 감성을 어느정도 지켜주게 되자 공동체끼리의 세력경쟁과 다툼이 생겨났다. 자기 공동체가 최선이라는 각 공동체의 내로남불이 수많은 성자와 영웅을 만들어 냈다. 이들의 편견은 그들 도덕과 윤리, 법에는 위배되었지만 공동체 조직의 생존엔 필수불가결이었고 공동체의 선이었다.

 

공동체에서의 역지사지는 개인 간의 역지사지와는 비교할 수 없이 어려웠다. 종교와 국가적 세력·권력강화가 살육, 폭력, 전쟁을 유발했다. 현재 미국, 이스라엘과 이란이 벌이고 있는 전쟁도 자기편만 정의라는 내로남불행태가 전세계 경제와 안보를 어렵게 만들고 있으며 종교와 국가간 갈등을 심화시킨다.

 

개인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집단 편견을 갖게 된다. 한때 우리는 중국인과 일본인을 짱꼴라’ ‘쪽발이라며 비하하는데 전혀 거슬림이 없었다. 일본인이 우리를 조센징이라 멸시한 것에 대해선 분노하며 일본과 일본인을 경멸했다. 한국과 일본은 각자 독도는 우리땅이라 주장하며 결속했다. 이를 부정하면 매국노가 되었다. 오히려 강한 편견이 종교나 국가의 단결과 부흥에 활력소가 된 것이다.

 

먼 미래에 외계인이 지구 탐색을 위해 방문하는 것을 상상해본다. 아마도 한국과 일본, 미국과 이란뿐 아니라 지구촌 전체가 하나의 공동체로 똘똘 뭉쳐 대항할 것이다. 지구촌 지도자는 외계인들이 지구를 점령하려 왔다며 공동체 사람들을 결속시킬 것이며 외계인들은 지구촌 사람들이 자신들을 적대시한다며 지구인들에 대항할 것이다. 외계인들이 단순히 지구인들을 관찰하거나 교류하기 위해 왔다 하더라도 전 우주적 차원의 역지사지는 기대난망이다.

 

그러나 내로남불이 그릇되거나 악이라 여길 필요가 없다. 내로남불이 이중적인 태도를 비판되지만 그 모순적 행동이 오히려 활력소가 될 수 있으며 내로남불의 행태를 깨달으며 역지사지하는 포용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인간 본성의 내로남불생존법칙 속에서도 끊임없이 역지사지의 배려가 있기에 평화와 행복이 유지된다.

 

세계 곳곳에서 경제, 안보, 종교 분쟁으로 내로남불의 전쟁이 끊이질 않지만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그대로 방치해선 안된다. 국가간의 역지사지를 도모하기 위해 국제연맹을 창설했으나 실패했다가 국제연합을 다시 재건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러고 이제 국제연합도 국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은 한계에 이르렀다고 포기해선 안된다. 또 다른 기관 설립 등의 해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 미국과 이란의 내로남불식 주장에서 전쟁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스라엘 종교지도자인 랍비기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등 역지사지의 정신이 존재하기에 세상은 평화로울 수 있다.

 

종교 전쟁도 마찬가지다. 어느 종교든 내로남불하는 본성이 있다고 치부하며 내버려두면 안된다. 종교 경전의 황금율이 실천되지 못한다며 파산시켜도 안 될 일이다. 항금율은 그대로 존재해야 좋다. 혹 초종교적 사회가 되거나 외계인이 침투한다면 지구촌에선 더할 나위없이 좋은 규칙이다.

 

성경엔 "남이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도 그들에게 하라"(마태복음 712)라는 역지사지에 관한 황금율이 있다. 코란과 하디스에도 선에는 선으로 갚고,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대로 남을 대하라는 원칙이 강조되었다. ’나와 같이 그들도 그러하다‘(불경),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논어) 등 모든 종교경전에서 하나같이 나타나는 황금율이다.

 

유일신을 믿는 성경과 코란엔 또 다른 황금율이 존재한다. 그들의 하나님은 유난히 시기, 진노, 복수심이 많은 신으로서 무지막지한 살육과 폭력, 전쟁도 불사한다. 역지사지와 모순되는 황금율이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러한 종교에서도 부분적으로 상대 종교를 역지사지하는 사례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인 랍비가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등 초종교적 현상이 등장하고 있다.

 

인류 역사에 전쟁만 있었던게 아니다. 역사는 영웅이나 성인 위주의 전쟁과 분쟁사로 편의적구분, 기록되지만 기록되지 않은 평화의 시절과 사건이 더 많을 것이다. 현재도 세상이 온통 전쟁으로 떠들썩 한 것 같지만 지금 대한민국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전쟁 속에서도 꽃과 사랑은 피워나지 않는가. 그래서 오늘날과 같은 문명이 꽃피웠다. 아름다운 남녀의 사랑, 우아하고 경이로운 문화와 예술, 문학이 역사의 주류로 이어져왔다.

 

오늘날 언론들은 하나같이 역지사지의 뜻을 강조하려 애쓴다. 상식적인 정의와 도덕, 윤리, 법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실질적으로 잠재된 자기편향을 내세우지 않으며 양비론적 균형을 갖춘 양 행세한다. 그러나 언론이 국익이나 이념 앞에선 가학적 모습을 드러내는게 종교와 국가란 공동체 행태를 닮았다. 그렇다고 언론의 역할이 필요없다고 비판만 해서도 안된다. 균형갖춘 정의의 사도의 모습을 계속 연출해야 한다. 그래야 평화 구축에 일조할 수도 있다. 나처럼 내로남불과 역지사지의 공존을 인정하면 안된다. 그러다간 모두 망친다. 종교와 국가와 같이 언론도 역지사지의 명분을 우선 앞세우고 내로남불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

 

국가나 종교. 언론보다는 역사의 주류를 이루는 개인들이 그들 공동체의 모순을 알아채고 내로남불과 역지사지의 공존을 절실히 깨달을 수 밖에 없다.

 

국가와 종교는 교만할 수 밖에 없다. 자부심을 갖고 공동체를 결속시켜야 할 책임이 있으며 그래야 세력을 키우고 강성해진다. 그러나 개인들은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유대 랍비처럼 겸손하고 솔직해 질 수 있다. 상대를 완벽하게 역지사지 하지는 못할지라도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과 실천을 할 수 있다. 역사는 한사람한사람 개인들이 모여 만들어진다. 점점 그러한 시대로 되어 왔다. 국가와 종교의 경계를 넘어서 계속 그러한 진실을 주장하는 가운데 전쟁 속 평화, 내로남불 속 역사지지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상이 창조될 것이다. 또한 내로남불과 역지사지를 동시에 인정함으로써 인간 관계에서의 불만족과 갈등을 없애고 개인적 행복과 평안도 성취할 것이다.

 

* 추신- 삶과 죽음에서의 역지사지未知生焉知死

 

사람들은 모두 다 죽는다는 진실을 이야기하며 욕심버리고 살자를 강조한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나만은 죽지 않을 듯 살아간다. 죽어가는 주변사람들을 역지사지 못하고 내로남불식 욕심을 견지한다. 생자필멸을 황금율처럼 교훈으로 내세우며 가르치고 있는 종교성직자들의 실제 행태도 다를 바 없다. 사람의 한계다.

 

가보지도 않은 저 세상을 자신있게 확신하며 상대를 구원하려는 사람도 있다.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불쌍한 중생이다. 반대로 내생을 극구 부정하고 사후 영생을 믿는 사람들을 미망에 빠진 가엾은 사람으로 치부하는 사람도 있다. 측은한 상대를 깨닫게 하려고 애쓴다. 쌍방 모두 다 좋은 의도로 보고 인정할 수도 있다. 역지사지이다. 그러나 대부분 상대에 대한 질시와 갈등, 배척으로 흐른다. 내로남불이다. 

 

▲ 삶에서 죽음, 죽음에서 삶을 보는 시각에도 역지사지가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알지도 못하는 저승을 놓고 내로남불식 주장을 펼친다. 사람의 한계다,

 

역지사지(易地思之)’내로남불의 공존을 이야기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사족을 달고 싶어졌다. 삶에서 죽음을 보는 시각, 죽음에서 삶을 보는 시각에도 역지사지가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가 생각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세계는 아무 말없이 지나가는데 살아있는 사람들끼리 태격태격하거나 반목한다. 지금 세상에 새로운 말은 하나도 없다. 유신론자, 무신론자들의 갖가지 주장은 물론 세상의 철학, 사상도 다 거론더었던 것들이다.

 

최고의 전문직 지정인으로서 영과 혼을 연구하며 구도자적 삶을 사는 후배가 최근 철학시집을냈는데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시 한편이 공감되어 마무리 글을 대신 해본다.

 

미지생언지사(未知生焉知死)

 

저승을 알면 뭐 하랴

이승도 제대로 모르면서.

전생에 뭐 했는지 알면 뭐 하랴

이생도 제대로 못 살면서.

 

죽으면 알게 될 저승이고

죽으면 생각날 전생인데

알면 뭐 달라진다고

귀하고 아까운 시간

그걸 알려고 낭비하는가.

 

자신은 전생의 결과물이고

이생은 전생의 연속극이야

모를 게 뭐 있고 뭐가 궁금해?

지금 너나 잘해

네 맘보나 뜯어고쳐 봐.

 

세상에 없는 말은 이제 없어 그러니

네가 세상에 보탤 말도 없어

남 가르쳐 줄 생각 말아

남은 너보다 더 나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진짜 너나 잘해

<정영부의 철학시집 영과혼의 대화죽음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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