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삼국유사인가?
본지 논설위원인 장정태 삼국유사연구원장이 BBS TV 뉴스 ‘단박인터뷰’에서 24년 이끌어 온 삼국유사연구원의 역사, 자신과의 인연, 삼국유사의 의미, 삼국유사를 통한 불교와 민간신앙의 관계 규명 등 왜 삼국유사인지를 이야기했다.
5일 불교방송 마포 본사 17층 스튜디오에서 전경윤 문화부장이 진행한 인터뷰는 오는 17-18일 2회에 결쳐 방송된다. BBS 뉴스(불교 종합뉴스 프로그램)는 월-토 오전 7시/오전 10시/오후 4시 반/밤 10시, 1일 4회 방송된다. 인터뷰 내용 전문을 게재한다. <편집자 주>
-원장님께서는 아주 오랫동안 삼국유사를 연구해오셨습니다. 먼저 삼국유사에 대해 이렇게 집중적으로 연구를 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요? 먼저 원장이란 직함과 관련 제 변명을 먼저 해야겠습니다. 제가 삼국유사연구원이란 단체를 1991년 설립하면서 명함에 이름과 함께 인각사 마당에 있는 다음과 같은 글귀를 넣어 다녔습니다. 잠시 쾌활한 일 마음에 맞아 한가롭더니, 근심 속에 남모르게 젊은 얼굴 늙어졌네. 모름지기 황량(黃粱)이 다 익기를 기다리지 말고, 인생이 한 꿈과 같음을 깨달을 것을. 몸 닦는 것 잘못됨은 먼저 성의에 달린 것, 홀아비는 미인을 꿈꾸고 도둑은 재물 꿈꾸네. 어찌 가을날 하룻밤 꿈만으로, 때때로 눈을 감아 청량(淸凉)의 세상에 이르리.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관음(觀音)·정취(正趣), 조신(調信)- 황폐강 교수님을 비롯 여러분의 협조로 세워진 시비의 내용입니다. 평소 제 맨토를 자처하던 분이 명함에 아무런 표시도 없이 그냥 들고 다니면 상대방이 신뢰하지 않으니 직함을 넣었으면 좋겠다는 충고에 원장이란 명칭을 사용했는데 돌이켜 보니 이런 오만함이 없었습니다. 원장님은 일연 스님이시고 저는 그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구원의 역사는 1991년 서울 종로 대학로 우당기념관이 있에서 김용옥 교수님께서 매달 1회 총 12회 강의가 있었습니다. 교수님 강의 가운데 일본에서는 1958년 7월 일본 교토에서는 '삼국유사연구회'라는 삼국유사를 읽는 모임이 출범했다. 당시 멤버는 도시샤대 미시나 아키히데 교수, 와카야마대 무라카미 요시오 교수를 비롯한 한국사·일본사 전공 학자 6명이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주변에 분들에게 연구회 보다 큰 단체에 대해 물었더니 연구소는 혼자 하는 것이고 회는 회원이 있는 그보다는 규모가 큰 단체라는 말씀과 그 보다 큰 단체 명이 원이란 말에 삼국유사연구원이란 생각에 그렇게 작명을 하여 지금껏 사용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를 우리 민족의 성경이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전을 찾아보면 경은 불교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 혹은 유교의 가르침을 적은 사서오경의 서적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하면 특정종교에 속한 책이란 정의가 앞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책도 성경 가운데 구약성경은 유대민족의 역사서인 동시에 족보이기도 하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삼국유사는 우리의 고조선의 역사를 시작으로 고구려, 발해, 가야의 건국은 물론 왕들의 이야기는 물론 당시 백성들의 삶을 종교,사상,문학 등 총 망라한 책입니다. 유대민족의 역사서가 성경이란 이름으로 소개된다면 삼국유사는 그보다 더 큰 깊이를 가지고 있는 성경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우리민족의 성경이며 필독서라고 주장하는것입니다. -그동안의 삼국유사 연구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시고 어떤 문제가 있었다고 보셨습니까?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스님은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국존이셨습니다. 나라의 스승이셨던 분입니다. 그런 분이 요즘 유행하는 말로 B급 문화에 눈을 돌렸습니다. 민간신앙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수집하셨고 그리고 한권의 책으로 남기셨습니다. 그러나 이후 많은 연구자들은 그 B급 문화을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과감하게 그러나 무모하게 시작했습니다. B급 문화가 불교안에 녹아있는 민간신앙과 불교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 시대 스님이 삼국유사를 저술하시다면 기독교는 물론 우리민족종교라 할 수 있는 천도교의 수운 신사, 강증산, 원불교의 박중빈 대종사의 사상도 함께 그 큰 그릇에 담아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삼국유사를 소개한 성격이 평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삼국유사 연구를 위해 군위 인각사를 자주 다니셨는데 인각사는 어떤 의미가 있는 곳입니까? 삼국유사의 저술지와 관련 많은 논의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운문사와 인각사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열반하신 곳과 관련해서는 인각사를 부정하는 일이 없습니다. 스님께서 노년에 보내셨고 스님과 관련된 유물이 가장 많이 있습니다. 부도,비문는 물론 어머니 묘소가 바로 인근에 있습니다. 그곳은 삼국유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지와 같은 곳입니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스님은 어떤 업적이 있다고 보십니까? 세계는 미국이 주도하던 시대에서 이제는 중국이 G2로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부상은 경제적인 문제와 함께 역사침약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주변에 있는 나라들의 역사와 문화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역사속에 편입시키려는 일을 공공연하게 하고있습니다. 그런 중국의 역사 왜곡을 저지할 내용이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있습니다. “고조선의 건국은 요임금과 같은 때”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중국과 동등한 역사의 깊이가 있는 민족이며 단 한 차례도 그들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는 기록의 근거가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는것입니다. 이와같은 기록은 삼국유사의 가치와 스님의 혜안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모습은 언제라도 중국 대륙에 진출할 수 있는 호랑이 입을 가진 형상입니다. 중국이 가장 두려운 존재는 미국보다 국경을 맟닿고 있는 대한민국입니다. 턱 앞에 송곳같은 우리민족이 강을 건너면 언제라도 수도 베이징을 향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 군사력으로 중국이 가장 두려운것은 우리민족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가와 국경이 맟닿아있는 중국입장에서 어느 한곳 국지전이라고 일어난다면 내부적으로는 소수민족의 반발로 이어지면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입니다. 그 중심에 우리 민족이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중국의 입장에서는 역사왜곡을 통해 우리 민족의 정신적 속화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삼국유사를 통해 불교와 민간신앙의 관계를 규명하는 작업을 해오셨는데 불교와 민간 신앙의 융합이 한국 불교사에서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겁니까? 전 융합보다 습합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병행이론으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습합이란 대형 상점에서 상술로 사용하는 원 프러스 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일 더하기 일은 힘들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하나의 사상, 철학이 다른 사상과 철학을 만나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내듯 불교라는 외래종교가 한국이란 땅에 유입되면서 새로운 한국화되는 불교를 만들어가는 과정 그런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좀전에 말씀 드린 일 더하기 일은 힘들다는 기존에 하나의 사상 종교만을 고집한다면 믿거나 믿지 않으면 되는데 습합은 그 신앙속에서 다름을 찾아내고 그 다름이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 양쪽을 알아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쪽으로도 환영받지 못하지요. 불교에서는 비불교라고 민간신앙의 입장에서는 불교라고 참 애매한 그런 형태입니다. 그러면서 사찰에는 조왕을 비롯 산신,칠성,명부 등에 있습니다. 민간신앙에서는 불상을 모시고 스스로 법사,보살이라하면 서 말입니다. 과거에 민간신앙인들은 벽장속에 신상을 모셨는데 그것도 명두라는 거울과 방울 부채 정도였습니다. 방 한 구석에는 쌀과 엽전이 담긴 소반이 있었습니다. 그런 신앙형태에서 지금은 두 종교간 경계가 무너져있지요. 습합은 이런 두 종교간 경계가 무너진 모습입니다. 이자스민과 습합이론의 일치- 이자스민은 이미 우리 국민이고 그녀의 아이들은 이미 우리의 핏줄임에도 헛된 분별심으로 차별과 편견이라는 삿된 길을 걸었다. 이자스민의 길은 바로 대중을 태울 큰수레 대승의 길이요, 한국불교의 중심, 조계종이 가야할 길이다. 모두를 품고 다독이는 것 이것이 불교만의 장점이다. 사찰에는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중심으로 여타 부속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창건주의 영정이나 초상을 모신 조사당, 교리를 강학하는 강당, 절 안마당으로 들어서는 곳에 세워져 강당으로 쓰이기도 하고 때로는 법고, 목어, 운판 등을 걸어 두기도 하는 문루, 범종을 걸어 두는 종루, 각종 불경을 보관해 두는 경루, 불경을 새긴 목판을 보관하는 장경고, 스님의 살림살이가 이루어지는 요사체 등이 세워져있습니다. 이들 건물외에도 고려시대부터 도교, 민간신앙 등이 불교에 습합되면서 절 안에 별을 신앙하는 북두칠성, 용왕을 모신 용왕전, 염라대왕을 비롯하여 저승의 시왕 등을 모신 명부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간신앙인 산신을 모신 산신각등이 별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태백산 그 높은 산과 생경한 용왕을 모신 전각이 있습니다. 불교와 용 이둘의 관계는 부처님 당시 처음으로 불법에 귀의한 동물이란 상징성도 있지만 우리에게 용은 말 그대로 이무기가 변해서 용이된 물가에 사는 동물이 그 원형입니다. 주 신앙인들은 바다와 인접한 어촌, 어부들입니다. 어부들의 신앙 대상을 절에 건립함으로 용왕께 예를 가추고 살던 당시 신앙인들을 절로 이끌수 있었습다. 그리고 산에 사는 호랑이를 신앙하던 사람 별을 신앙하던 사람 모두 절이라는 공간, 가람이라는 불교 속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것은 당시 이땅에 살았던 이들의 신앙을 존중하고 그들이 번다한 세속사에 살면서 시간 낭비를 하지 않고 한 공간에서 이루어 질 수 있는 종교적인 시스템으로 변화를 도운 당시 스님들의 배려하심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요즘 말하는 습합의 원리이며 상대의 존재성을 인정하고 함께 어우러 질 수 있는 문화의 조성입니다. 이런 잡다하고 번다한 것을 사찰안으로 끌어들인 종교현상을 놓고 정법을 주장하는 스님,불교신도들에 입장에서 보면 엉뚱한 발상이지만 그들을 어머니의 품처럼 불교가 품고 함께 살자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일연스님은 작은 한권에 책(삼국유사)를 통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이지요. 금년 4월이면 국회의원 선거가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고속승진의 기회가 주어지는 그런 제도라고 생각하는데 총원이 300명을 품을 수 있는 공간으로 국회라는 가람이 세워져 있습니다. 국회가 가람이라면 그 속에서 활동하게 되는 국회의원들은 가람에 속한 전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국회라는 가람에 새로 300여 전각이 들어선것입니다. 우리는 그 많은 전각에 우리 문화와 다른 새로운 전각을 하나 세웠습니다. 필리핀 댁이라고 불리는 이자스민이란 이주민 여성이 그 주인공입니다. 백인 여성, 이국적인 그래머 여성도 아니고 제3세계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의 볼품없어 보이는 여성을 대한민국을 대표한 국회의원으로 품은 것입니다. 국회가 대한민국 국민이 품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와 민간신앙의 갈등에서 불교가 민간신앙을 품었던 것처럼 이자스민이라는 가람을 품은 것입니다. 이것은 일연이 이땅에 살았던 사람,신앙을 품어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보여준 900여년전 그 정신이 오늘 되살아난 것입니다. 습합이란 학술용어가 아니라 상대를 품고 함께 할 수 있다는 따스한 마음, 모두를 함께 태워 언제라고 떠날 수 있다는 대승의 마음으로 모두를 받아들인 한국불교의 정신으로 모두를 태우고 떠나는 것입니다. 소수자를 배려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들도 나와 같은 공간에서 신앙할 수 있도록 땅과 건물을 내주었던 그리고 함께 신앙하도록 배려해준 습합의 마음으로 떠나는 아름다운 여행인 것입니다. 절에 산신각, 칠성각 세우는 것과 같은 효과입니다. 절안에 산신각 있는것, 산신을 불교교리로 받아들인것 아니라 산신을 믿는 마음의 불안을 품은 것입니다. 즉 사람, 당대의 민중을 품듯 이민족 또는 혼혈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미 국민인 분들이 차별로인해 불안한 마음을 국회라는 국가의 가람에서 한 자리를 내어 품은 것이라고 봅니다. 신신각과 칠성각이 한국불교에 했던 역할처럼 이자스민 공천은 대한민국 헌정사에 길이 빛날 업적입니다. 이미 국민이고 그녀의 아이들은 이미 우리의 핏줄임에도 헛된 분별심으로 차별과 편견이라는 삿된 길을 걸었던것입니다. 이자스민의 길은 바로 대중을 태울 큰수레 대승의 길이요, 한국불교의 중심, 조계종이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를 품고 다독이는 것 이것이 불교만의 장점이 아닌가요 우리 불교속에 얼만나 많은 이질적인 요소가 융합되어 흘러가고 있습니까. 이런 한국불교만의 장점을 장 지켜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것은 특히 조계종이란 전통종단에서 계승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중층신앙(中層信仰)이라고 합니다. 각 종교의 교의(敎儀)나 의례(儀禮)가 서로 혼교(混交)하여 독특한 형태를 만들어내는 현상을 말합니다. 기독교가 게르만 사회에 정착했을 때 그곳의 토착신앙이나 습속과 융합하여 독특한 신앙형태를 만들어낸 것 등이 그러한 예라고 하겠지요. 이와 같은 습합현상을 종교가 구체적 생활에 밀착하고 있는 것 이상 그 규모나 정도의 차이는 있다해도 거의 대부분의 종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계기나 요인에는 정복민족이 자기의 종교체계를 피정복민족에게 강요할 경우, 선교활동의 과정에서 그 수단으로 이교(異敎)를 이용할 경우, 문화의 전파·교류로써 생겨날 경우, 지배자의 종교정책에 의하는 경우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매년 군위 인각사에서는 삼국유사 문화축제가 열립니다. 축제와 관련 의견을 보이시면 행사 관계자들이 참고할 것 같습니다. 문화축제와 관련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저는 이 책의 저자 일연스님을 중심으로 말씀드린다면 스님은 병든 늙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낙향을 왕께 청하니 충렬왕은 그의 간청을 받아들여 그가 머물 인각사를 중축 보수하여 그가 머물기에 부족함이 없게 해주는 세심한 배려를 해줍니다. 한 나라의 스승으로 추앙받던 78세의 노령의 스님이 노모에 바친 극진한 효성은 진정 아름다운 것이었고,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찬탄해 마지않았습니다. 스님이 목암으로 자처했던 것도 효성이 지극한 진존숙을 흠모했기 때문입니다. 진존숙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인 목주로 거처를 옮겨 밤을 지새우며 삼은 짚신으로 어머니를 모셨던 중국의 고승입니다. 충렬왕 10년(1284)에 일연의 어머니가 96세로 별세하였는데 일연은 맞은편에 있는 어머니의 산소를 지켜볼 수 있는 곳에 자신의 부도를 설치하는 효성을 보입니다. 삼국유사는 다른 책과 다르게 효선편이라는 한 편이 있습니다. 5편의 글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현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할 부분도 있습니다. 손순부부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어린 자식을 땅에 묻겠다는 결심을 하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살을 베어 부모를 봉양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결국 스님은 자신의 삶은 물론 세상의 이야기 가운데 효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책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괴이한 이야기가 아니라 효의 실천을 강조하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효와 관련된 행사를 주최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입니다. 전국 어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연예인 초청 행사가 아니라 스님의 사상을 오롯이 펼 수 있는 그런 문화의 정착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삼국유사 소재 주제를 통해 한편의 연극을 만드는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번 주지 소임을 맡았던 도권스님이 창작 연극을 공연에 올린 것도 바람직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연과 삼국유사라는 협의적 주제의 논문만 대상으로 하지않고 효 관련 논문을 학술상에 포함시키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을에 전해내려오는 이야기 가운데 스님의 부도와 어머니 묘소를 이어주는 무지개 다리가 놓였다 내용이 있습니다. 사후에도 어머니를 찾았다는 구전은 생전에 스님의 어머니에 대한 각별한 효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해안 지방에서 불교 관음 신앙과 대표적인 민간 신앙인 용신앙이 어떻게 융합되고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연구하셨는데 그 내용을 한번 정리해보죠.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여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유입되면서 한국 고유신앙인 산신과 만나 산신신앙을 형성하고 중국 고유종교인 도교에서는 북두칠성과 조왕을 받아들여 북두각, 공양간(부엌)이란 별도에 공간을 통해 신앙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둘 이상의 사물이 한 공간속에 공존하는것을 병행현상이라고 합니다. 병행은 만물이 함께 생성되어도 서로 방해되지 않고 도는 함께 행하여도 서로 거슬리지 않아야 한다.(萬物이 竝育而不相害하며 道 竝行而不相悖 『중용』30장) 중용에 나오는 말입니다. <예기(禮記)> ‘예운편(禮運編)’에 ‘병행이불류(竝行而不謬)’라 하여 양도(兩道)가 아울러가나 서로 어굿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병행론(竝行論 parallelism)은 정신물리병행론(精神物理竝行論)이라고도 말합니다. 물질과 정신을 두 개의 각각 독립된 존재로 보지만, 양자에 나타난 각각의 현상에서는 병행하고 대응하는 관계로 보기도 하고이와같이 한 공간에 다양한 신앙이 가능한것은 이들 신앙에 대한 신자(구매자)들의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용신을 보이는 곳은 주로 해안지방입니다. 농경문화가 받아들였던 용의 이미지는 가정의 행복, 장수복록, 다남, 무병 등을 기원하는 용왕제(굿)으로 신앙되고 있습니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불교가 전래되면서 삼국시대 불교가 지배적인 종교가 되고 용왕보다는 부처, 보살에게 비는 기원의 형식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민중들은 자신들이 신앙하던 토템적 성격의 용신앙과 불교의 관음을 결합시켜 해수관음이라는 신앙형태로 발전시켰고 용신앙과 해수관음신앙은 한반도의 동해안에서 남해안, 서해안에 이르기 까지 광범위하게 분포하게 됩니다. 관음신앙이 해안지역에서 기존의 용신앙과 함께 신앙되는 이면에는 주민들의 만선의 꿈과 평화로운 조업을 위한 기도의 목적이 같고 그것을 이루워줄 대상이 같다는 의식에서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 바다를 연해 살아온 해변주민들은 바다가 삶의 터전이면서 두려운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곳을 지배하는 신성한 대상을 향해 자연신적 신앙이 형성되었습니다. 불교 전래이후 관음신앙이 지역적 배경에 의해 토착신앙인 용신앙과 불교와 습합되어 관세음보살과 용이 결합된 형태의 신과 병행하는 신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 두 신앙은 사찰내 산신각, 칠성각과 함께 용왕전이란 별도의 전각을 통해 지금도 신앙되고 있습니다. 신앙자들의 입장에 따라 무교적 용신앙과 불교적 용신앙으로 다면적 신앙되고 있는것입니다. 이들에게 불교의 해수관음이란 주장도 무교의 용신앙이란 개념, 정의가 무의미할 만큼 자연스럽게 병행되면서 교차신앙되고 있습니다. -주요 저술 가운데 삼국유사에 나타난 점복 예언이라는 논문이 있는데 어떤 내용인지 소개해주시죠. 삼국유사 설화에 나타난 다양한 점복은 현대의 점복과 달리 이미 일어난 현상에 내재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이루어졌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삼국유사에서 나타난 점복 양상을 살펴본 결과, 점복은 단순히 흥미를 위해 삽입된 것이 아니라 설화의 서사 진행을 조력하며 사건 진행의 방향 제시, 해소의 중재, 불교적 서술의식 표명 등 다양한 서사적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점복은 점치는 행위와 그 결과의 의미를 파악하고 인식하는 과정으로서 ‘일관, 점(占), 복(卜), 무(巫)’ 등의 점복 어휘 서술은 삼국유사의 기사(記事) 19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삼국유사에서 점복과 예언의 주체적 역할을 하는 주인공으로는 왕을 비롯하여, 왕족, 귀족, 일관, 스님, 국선, 문인, 점복자, 무당, 남녀노소 등 일반인은 물론 까마귀, 솔개, 흰 닭 등 동물들도 예언의 간접도구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신라에서 왕은 통치자이며 동시에 기후와 농사의 풍흉을 점치고 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와 그 구성원들을 보호하는 예언은 물론 각종 의례를 주재하고 있습니다. 선덕여왕이 그림을 보고 국사에 관련된 세 종류의 예언을 하고 있는 것이 그러한 예가 됩니다. 첫째는 당 태종이 홍색·자색·백색의 3색으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그 씨앗 3되를 보내 왔다. 왕이 그림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며 종자를 심도록 하였는데 그 꽃이 피었을 때 그 말과 같았다. 두 번째는 영묘사 옥문지에 겨울철인데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 3,4일 동안 울어댔다. 나라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기고 왕에게 물었더니. “정예병 2,000명을 거느리고 속히 서교로 가서 여근곡을 물으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덮쳐 죽여라.” 하였다…….과연 그곳에는 백제 군사 500명이 와서 숨어 있었다. 세 번 째는 왕이 무양할 때 군신들에게 “짐이 어느 해 어느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 가운데 장사하라.”고 하였다. 군신들이 묻자 “낭산 남쪽이다.”라고 하였다. 그달 그날이 오자 과연 왕이 죽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나 문무대왕이 왕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를 창건하였다. 이것은 예언을 통해 왕은 수혜자적 입장에서 왕 스스로 점을 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성(선덕여왕)의 은밀한 곳을 옥문이라 표현하고 있으며, 그곳에 남성이 거시기가 들어가 일정 시간이 흐른 후 남성성은 죽는 것으로 표현은 단순히 예언이기보다 성의식의 개방성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노자는 더 진지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곡신은 죽지 않는다. 이것을 현빈이라 이른다. 현빈의 문, 이것은 천지의 뿌리라 이른다. 면면히 있는 것 같이 써도 지치지 않는다. 여기에서 곡신(谷神)은 골짜기의 오목한 곳에 묵고 있는 신령(神靈)이란 뜻으로 여성의 음부를 신비스럽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유사에서는 이와 관련 여자는 음이니 그 색깔이 흰데 흰 색은 서쪽을 나타낸다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에서 그 중심이 공동이거나 안에 뭔가를 넣을 수 있는 것을 특징으로 한 물건에 의해 상징적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여성성의 상징은 단순한 예지로써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역에 기초한 것으로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 역이 보편적 학문으로 수학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란꽃은 부귀, 나비는 질수(80세)를 뜻하기 때문에 당 태종이 홍색, 자색, 백색의 3색으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그 씨앗 3되를 보내왔습니다. 왕이 그림의 꽃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며 종자를 뜰에 심도록 하였다. 그 꽃이 피어났다가 떨어지기를 기다려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그러나 모란꽃에 나비를 그려 넣으면 부귀질수의 뜻이 되어, 의미가 80으로 한정하기 때문에, 애써 모란도에 나비를 그려 넣지 않는다. 그러나 선덕여왕의 지기삼사 가운데 모란과 관련된 예언은 당시 중국의 풍습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만 선덕여왕의 예언적 능력은 그녀가 여자라는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미래의 일까지도 알아맞히는 신이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선덕왕 집권기 첨성대를 설치하여 하늘의 운행을 통해 천재지변을 알고자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문무왕이 알아서 사천왕사를 건립의 건립으로 여왕의 도솔천에 안장되는 결과를 보였습니다. 삼국유사의 점복과 예언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의 나열이 아니라 흥미로운 소재입니다. -불교와는 어떤 인연이 있으십니까? 제 주변에 많은 분들이 자신은 불교경전의 한 구절에 반해 불교에 귀의했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저를 돌아보면 저 그런 교학적인 인연이 없이 그저 할머니가 도선사에 다니시면서 자연스럽게 불교를 믿게되었습니다. 마포에서 강북구 도선사는 지금도 대중교통만 이용한다면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 그곳을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할머니께서는 신앙심이 깊지 않으셨는지 늘 기도스님 만 찾으셨습니다. 다른분들은 주지스님, 총무,재무 스님 하면서 큰스님들과 교분을 쌓으셨는데 그분은 늘 기도스님만 찾으셨는데 아마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분은 큰 스님이 아니라 열심히 기도하시는 분이란 의식을 나름대로 가지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가장 현실적인 신앙이 아닌가 합니다. 다만 저는 제 장남이 지금 25세입니다. 그 아이 백일 기념으로 현재 도선사 혜성 문장 큰스님께서 도명이라는 불명을 주셨습니다. 저 역시 지난 월요일 도선사를 다녀왔습니다. 오늘 실수하지 않게 도와주십시요하는 마음으로 석불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앞으로 또 해야할 연구가 있다면 어떤 겁니까? 고조선, 고구려, 말갈, 부여등 삼국유사 기이편에 나오는 북한 지역을 한번 다녀왔으면 합니다. 분단이후 북쪽에 산재되어 있는 삼국유사 현장이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습니다. 이런 작업을 통해 남북한의 역사 복원이 되었으면 합니다. 삼국유사를 통해 우리의 역사가 복원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삼국유사는 우리민족에게 꾸준히 읽힌 책인지요. 많은 사람들이 삼국유사는 민족의 고전으로 줄곧 읽힌 책이란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13세기 일연에 의해 만들어져 오늘날 우리가 삼국유사를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경주 부윤(府尹) 이계복(李繼福)이 조선의 르네상스라 할 수 있는 중종 7년(1512) 임신년(壬申年)에 복간 한 덕분입니다. 그는 한 지방 관리로서 민족의 역사를 후대에 알려야겠다는 뛰어난 사명감으로, 여러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삼국사기와 함께 삼국유사를 간행하였습니다. 한꺼번에 새롭게 판각을 할 수 없어서 구각판(舊刻板)을 사용하기도 하고, 한 곳에서 전부를 새길 수 없어서 여러 읍에 나누어 일을 진행하였습니다. 이후 단 한번도 인쇄되지 않았던 책이 삼국유사입니다. 그런책이 20세기 들어 새롭게 해석되고 있습니다. 700년 만에 재 조명되고 있는 삼국유사는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350 여 종의 번역서가 나오고 30여종이 더 많은것이 그리스 로마신화입니다. 그 다음이 춘향전이 180종이 입니다. 춘향전은 영화소재로 하면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고 어느 정도 마니아층을 가지고 있다는 우리의 고전인데 이 책보다 두 배 정도 더 읽힌 책이 삼국유사입니다. 삼국유사 존재를 몰랐던 이 책이 최근 우리들 사이에 읽히기 시작한 이유는 사실 미스터리입니다. 더 나아가 20여년 넉넉잡아 30여년 전만해도 삼국유사는 우리들 속에 단순히 삼국사기의 저자는 김부식. 삼국유사는 일연이라는 국사시험 선택형 문제의 하나로 기억되어야 하는것입니다. 늘 고민스럽게 했던 제목입니다 그런 책이 가장많이 번역되었습니다. 많은 번역서 가운데 처음에는 최남선을 비롯하여 권상로, 이재호, 이병도 등의 번역정도 이었는데 어느날 돌아보니 350여 종에 이르는 번역서에 만화까지 다양한 장르에 책이 출판되고 앞으로도 더 많은 책이 출판될 것입니다. 30여 년 전 삼국유사연구원이란 단체를 만들어 명함을 가지고 다닐 때 거의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전문적 연구할 가치가 있는 분량이 되는지 그런 세월이 지나 이 자리까지 와보니 저 자신 감정이 다양해집니다. 삼국유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우리보다 일본에서 먼저 시작했습니다. 1904년 동경대학에서 배인본(排印本)을 출판했고 이것은 간다본과 도쿠가와 본을 저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두책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 가운데 한 사람이 퇴각하면서 조선에 귀한서책을 가져가는 속에 두 책이 포함되었고 그 중 한권을 도쿠가와에게 선물하게 된것입니다. 1916년 이마니시류(今西龍)가 ‘순암수택본’을 인사동 골목에서 발견하여 일본에 가져가 1926년 교토대학에서 영인본을 내놓았습니다. 이마니시류가 당시 인사동에서 발견했다는 것은 역으로 그가 동경대학에서 공부했다는 추론하게 됩니다. 조선의 르네상스시기를 영정조 시대가 아니라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조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봅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이유가 있는지요 일연 스님 당시 출판 된 이후 경주 군수 이계복에 의해 출판되지 않았다면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을 책입니다. 이계복이 살던 1500년대는 조선 문학의 르네상스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자는 영정조대 특히 정조 시대를 그렇게 보는데 사실 정조집권기는 지식인들이 숨 막혔던 시절입니다. 조선시대에 정조가 당시 유행하던 신체문(新體文)이라는 문체가 명나라와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패관소설(稗官小說)의 영향으로 순정성을 잃고 잡문체로 전락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순수한 고문(古文)으로 돌아갈 걸 지시한 사건입니다. 다시말해 ‘반정(反正)’은 ‘바른 곳으로 되돌린다. 는 뜻으로, 정조는 서학 금단책의 일환으로 문체반정을 주도하였습니다. 정조는 1792년(정조 16년) 과거시험을 포함하여 사대부 계층의 글쓰기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검열을 실시했습니다. 삼국유사를 재 발행했던 중종시대는 1506년에 음력 9월 2일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성희안(成希顔) · 박원종(朴元宗) · 유순정(柳順汀)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이 성공함에 따라 조선의 새 임금으로 추대되었습니다. 당시 진성대군은 자신을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온 반정군을 적으로 여겼을 정도로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반정군에 의해 추대 제의를 여러 번 받을 때부터 그는 신하가 임금을 택한다(澤君)는 것에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집권 후에는 조광조를 비롯하여 신진사대부를 등용 개혁을 주도한 개혁군주라는 평가를 듣기도 하지만 기묘사화를 통해 권력욕을 드러낸 군주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당시는 언론출판에 관한 자유로운 분위기라는 것이 유학자가 승려가 쓴 책 그것도 황당무계하고 귀신 신 나락 까먹는 소리가 있는 책을 낼 수 있었던 점에 중종은 위대한 문화군주라고 생각합니다. 정조를 잠시 추가 설명을한다면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저술후 반성문을 쓰고 목숨을 구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열하일기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주었던 명을 멸망시키고 청을 세운 오랑캐에게 배워야한다는 박지원의 주장이 담긴 이 책은 <인쇄판본>이 없는 필사본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인쇄마저 할 수 없는 책이 <열하일기>입니다. 중종 당시 삼국유사 뿐 아니라 다양한 책들이 나왔습니다. 정조 때라면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책을 출판했다면 이계복은 삭탈관직 후 멀리 고도로 귀양을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왕이 무관심했다는 사실이고 이계복이 출판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돌아보면 일연이 살았던 고려시대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모습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몽고의 침략과 일제의 침략으로 식민지 경험 과거의 역사는 현재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실감나는 시대에 와있습니다. -일연스님과 관련 간단히 소개부탁합니다 일연스님의 속명은 견명(見明) 밝을 명(明)에 볼 견(見)입니다. 자는 회연(誨然) 호는 목암(睦庵) 그의 어머니 꿈에 해가 몸을 감싸며 낳았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9세에 광주 무량사에 들어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연(一然)이란 불명은 그의 나이 50대 중반부터 사용하기 시작해왔다. 본명의 어두움과 밝음을 하나로 보겠다는 뜻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결국 신토불이의 사상이고 밝음과 어둠을 하나로 보겠다는 생각이 삼국유사에서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삼국유사 내용 가운데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면 한 부분만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좀전에 말씀 드렸듯 중국의 동북공정의 반박의 논리가 있고 중국의 ⅓을 지배했던 고구려, 발해 그리고 한반도에서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던 가야의 역사가 있습니다. 특히 가야는 해양을 지배하던 문화는 다문화사회의 모범사례입니다.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어린 소녀를 자국의 왕비로 모시고 그녀는 남편 김수로왕 사이에 난 11명의 자녀를 남편의 성과 자신의 성으로 함께 물려주었습니다. 인류사에서 남편의 성과 자신의 성으로 자녀에게 나누워주는 예는 전무후무 한 일입니다. 최근세 종교 지도자 가운데 앞으로 오는 세상은 여성상위 시대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예언전 우리는 여권신장의 사회를 경험했습니다. 혹 가야는 우리가 이상적 사회라 생각하는 모계지배사회는 아니였는지 흥미로운 대목이기도 합니다. -밀교종단인 진각종과도 인연이 있으신데 진각종 신문인 진각종보 기자를 했던 경력이 있습니다만 소개해주시죠. 꼭 종보사에만 근무한 것은 아니고 교육원, 홍교부 등 여려곳에 있었습니다. 종단을 떠날 때 종보사에 있었지요. 이번 질문은 참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젊은 날을 추억할 수 있는 것이 참 좋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그곳에서 결혼식을 가졌으니 돌아보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신행을 다녀와서 종단 어른들게 인사차 들렸습니다. 당시 종단의 어른이셨던 각해 정사님을 뵈는데 밖에서 병원 구급차가 급하게 소리를 내며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정사님께서 저희 두 사람을 앞에 놓고 희사와 염송을 하시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입니다. 살면서 남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종단에서 배운 습이란 생각을 합니다. <저작권자 ⓒ CR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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