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Q정전을 읽고
아Q는 미장(未庄) 마을에서 머슴처럼 살고 있는 서른 살의 막노동꾼이다. 밥벌이가 있으면 일을 가고 없으면 말고 하는, 지금으로 말하면 망나니 품성을 지닌 노숙자라 할 만하다. 거기다 아Q의 흥미로운 성격 중의 하나가 동네에서 불량배에게 수모를 당하고 이유 없이 맞아도 ‘그래 니가 내 아들이다. 아들놈한테 얻어맞은 걸로 치지 뭐!’ 라고 스스로 위안을 한다는 것. “야 이 자식들아 니들은 지금 사람을 때리는 게 아니고 짐승을 때리는 거야. 그래 난 버러지다.” 라며 자신을 학대하며 그들을 자신이 용서해 주었다고 정신 쇠뇌를 한다. ‘아이고, 내가 맞을 만한 짓을 했겠지! 저런 놈들한테 대들어봐야 뭘 해, 시간이 아깝다, 아까워!’ 라고 생각하며 자기 합리화를 하며 잊는다. 마작 놀음을 하다 상대방에게 딴 것을 모두 빼앗겨도 자신의 뺨을 후려갈기며 ‘그래, 재수가 옴 붙었다고 생각하자!’ 스스로 위안하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집에 돌아와 코를 골며 잔다. 그러니까 현실에서는 졌지만 자신의 생각에선 늘 이기는 것이다. 이러니 그는 인생이 즐겁기만 하다.
아Q는 자기중심적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성격장애자인처럼 행동한다. 소설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으로 등장하는 지주나 가짜 양놈에게는 한없이 비굴하게 고개를 숙인다. 반면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모멸감을 주며 억지 거만스러운 행동을 하며 못되게 군다. 자신이 받은 수모를 화풀이 하듯 마을에 사는 비구니에게 성추행을 하거나 힘이 약한 사람에게는 폭력을 일삼으며 무척 만족감을 느낀다. 그는 정신세계에서는 늘 자신이 승리자라고 우월감을 갖는다. 하지만 아Q의 정신승리는 위험했다. 노름하고 싸움하고 성추행하고 허세를 부리면서 스스로 잘 했다고 칭찬하는 오만과 모욕의 정신승리이기 때문이다.
아Q가 혁명에 참가하게 된 큰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마을에 있는 지주 자오 나리댁 일을 도와주는 청상과부 우 아낙에게 동침을 요구하다 혼줄이 난다. 결국 마을에서 일자리도 못 구하고 성내로 흘러간다. ‘자고로 남자는 얼굴보다 호주머니가 두둑해야 돼!’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성내에 있는 ‘거인 나리’ 댁에서 불법적인 일을 도와주며 적지 않은 돈을 벌어 미장 마을로 돌아온다. 이때 마을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이것은 쑨원이 주도한 신해혁명이었다. 아Q는 처음에는 ‘아니, 저것들 왜 혁명을 하지?’라고 생각하며 혁명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가만히 보니 아Q를 혼내던 자들이 혁명이 나니까 벌벌 떠는 모습을 보인다. ‘어허! 이거, 봐라, 혁명이 좋을 수도 있구나, 나도 혁명을 해 볼까?’ ‘혁명에 투항한다면 이제 내가 갖고 싶은 건 전부 내 것이야!’ ‘여자도 내 것이고, 예전에 나를 못살게 굴었던 놈들도 전부 혼내줄 거야!’
아Q는 평소 자신을 무시하던 사람들이 혁명당을 보고 무서워하자 혁명당원이 되기로 결심한다. 혁명을 하려면 모습부터 혁명가로 바꾸기 위해 변발을 말아 올리고 은 복숭아 뱃지를 달고 혁명당원과 알고 지내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혁명을 주도하는 세력들은 입당시켜 주지 않았고 오히려 자오씨 댁 약탈 범으로 죄를 씌워 아Q는 관청에 잡혀가고 만다. 그는 여기서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는다. 관원은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자백을 받으려고 종이 한 장과 붓 한 자루를 아Q 앞에 내 놓으며 서명을 요구하였다.
손에 붓을 처음 잡아 본 아Q는 “지는… 지는…, 글을 모르는 까막눈입니다요.” “그럼, 동그라미라도 그리던지, 알아서 하거라!” 아Q는 혼신의 힘을 다해 동그라미를 그렸다. 떨리는 손으로 그리다 보니 호박씨 모양의 동그라미가 되고 말았다. 그는 그렇게 죽음의 표시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다시 감옥 안으로 들어갔지만 자신 만의 정신승리로 위안하며 걱정 하지 않았다. ‘인생을 살다보면, 감옥을 들락거릴 일도 생기고, 종이에 동그라미를 그릴 일도 생기지. 하지만 동그라미가 둥글지 못한 것이 내 인생에 큰 오점으로 남을 뿐이야!’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도 사라졌다.
“사형장으로 가는 길” 아Q는 낡은 장삼조차 걸치지 못한 채 상체는 오랏줄로 단단히 묶였다. 수많은 구경꾼들이 늘어서 있는 길을 포장 없는 수레는 지친 듯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야 군중에게 조롱거리가 되면서 형장으로 끌려간다는 걸 눈치 챈다. 죽은 시체를 노리는 하이에나 눈빛을 한 군중들이 벌떼처럼 모여 구경꾼 자세로 아Q를 바라보고 있다. 반짝이는 눈알들이 한데 뭉쳐지더니 그의 몸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살려… 줘!…….” 군중들은 아Q가 죄를 저질렀다는 것에 이견은 없었다. 하지만 구경꾼 대다수가 불만스러웠다. 총살은 ‘싹둑!’ 하는 참수형만큼 흥분되는 구경거리가 못 된다는 거였다.
아Q는 자신의 지리멸렬(支離滅裂)한 삶을 정신승리라고 세뇌를 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에 평안을 얻고 행복을 얻는 길을 찾았다. 그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 바로미터(barometer)가 되어 주었다. 망상이지만 마음을 다독거릴 수 있는 최면을 걸어 자신을 우월하다고 애쓰는 사람에게는 불안이 있을 수 없으며 열등의식이 생겨날 리 없다. 어쩌면 아Q의 인간상이 축축한 빈틈이 많은 세상을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있는 처세가 될 수도 있다.
잘난 사람들만 가득한 세상에서 슬기롭게 살아가는 비결은 이 한마디만 생각하면 된다. ‘남에게 좀 져주는 듯 살아라!’ 지는 사람이 결국에는 이기는 사람이라 하지 않는가. 자신이 잘 났다고 잘난척하는 사람은 스스로 도취해 많은 적을 많이 만든다. 언쟁이란 결국 예외 없이 자신의 처지에서 자기 설명이 옳다는 생각을 더욱 굳게 하기 마련이다. 언쟁에 설령 이긴다 해도 사실에 있어서는 진 것과 마찬가지가 될 수 있다. 언쟁에서 이길지는 몰라도 타인의 호의나 마음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루쉰은 소설 속에서 주인공 아Q를 가련하게 생각하지 않고 총살이라는 최악의 결말을 내렸다. 아마도 그 시대 중국인들에게 아Q처럼 살지 말라는 각성 메시지를 보낸 것 아닐까? 또는 중국인에게 세상을 못 읽는 까막눈이 되어선 안 되고 글을 익혀 무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채찍질을 주인공 아Q를 내세워 알리려 한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본다. “죄를 인정하는가!” 라는 절체절명(絶體絶命) 순간 배움이 깊었다면 아Q는 당당하게 0 아니고 × 를 그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총살형으로 죽을 운명을 만났다.
이렇게 루쉰의 소설을 읽고 느끼고 탐색하는 것은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옛 선인들의 고전(古典) 문학의 역사를 배우고 현재의 나를 성장시키기 위함이다. 거죽의 표현보다 그 속뜻을 알아차리니 정신이 번쩍 든다. 적막한 문학 역사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 민중들에게 ‘민족혼’이라 불리는 루쉰. 그는 몸과 정신의 아픔을 문학으로 이겨내어 마침내 중국의 대문호가 되었다. 생생한 언어와 문자를 통해 치열하게 살아내던 민중의 모습을 가장 진솔하게 그리고 강렬하게 세계인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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