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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은 정신적 造山의 가장 높은 靈峯을 분출시킨 혼”

박종천 교수 | 기사입력 2024/10/31 [09:43]
변찬린의 새종교관과 증산사상 이해에 대한 연구⓷

“증산은 정신적 造山의 가장 높은 靈峯을 분출시킨 혼”

변찬린의 새종교관과 증산사상 이해에 대한 연구⓷

박종천 교수 | 입력 : 2024/10/31 [09:43]

변찬린의 새종교관과 증산사상 이해에 대한 연구

<연재순서>

. 머리말: 기독교와 불교와 유교와 민족종교까지 포괄하는 새로운 종교관 제시한 변찬린

. 변찬린의 선() 중심적 종교론

. 풍류도/선도의 관점에서 본 변찬린의 증산사상 이해

. 한국 근대 자생신종교의 비교: 동학의 시천주와 증산의 태을주

. 맺음말 : 풍류도의 회통적 영성과 선도적 특성

 

1. 후천개벽의 천지공사와 해원의 새종교

 

19세기 이후 역사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한국의 자생 신종교들은 조선시대 유교적 사회질서를 내부적으로 뒤흔들었던 다양한 도참(圖讖), 풍수지리, 점복, 주술 등을 흡수하여 재전유하면서도 하층민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서발턴(subaltern)들의 원한을 풀고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새로운 후천개벽의 종교적 이상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이는 기성 질서를 전면적으로 대체할 만한 대안적 비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기성 질서의 주변부에 머무르는 서발턴의 밀레니엄적 주변종교(marginal religion)’를 넘어서서 기성 질서를 대체할 수 있는 탈-서발턴(post-subaltern)유토피아적 대안종교(alternative religion)’의 가능성을 선보였다.

 

변찬린은 이러한 한국의 자생신종교들을 미신이나 혹세무민의 주변종교적 신흥종교가 아니라 기성 종교들의 문제점을 극복할 만한 새로운 근대적 가능성을 표출하는 대안종교적 새종교로 이해하였다.

 

증산사상에 대한 변찬린의 최초의 연구는 1975년에 발표한 <증산의 해원사상>이다. 변찬린은 독일의 실존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축의 시대’(Achsenzeit) 개념의 영향을 수용하여 석가, 노자, 공자, 소크라테스, 조로아스터, 예수까지 각 문명권의 풍토와 민족성의 특질에 따라 성인(聖人)들이 인간의 혼()을 개화시킨조로아스터교, 도교, 불교, 유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등과 같은 고등종교들이 정신의 화산(火山)시대혹은 인류정신의 조산(造山)시대를 열었다고 평가하였으며, 칼 야스퍼스가 주목했던 자연의 보편법칙과 정신화(Vergeistigung)’를 주목하여, 문명권을 형성한 세계종교들이 인간의 혼을 개화(開化)하여무명(無明)에서 비롯되는 미개한 동물성[獸性]에서 탈피한 문명(文明)의 혼으로 개명(開明)시켰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세계종교는 제종교의 독선과 타종교에 대한 배척으로 인해 개별적 도강(道綱), 즉 교리(dogma)에 갇힌 호교론과 선교(宣敎)를 위해 각축하는 종교상인(宗敎商人)’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이해는 정령과 우상숭배단계의 무명의 야만적 동물성에서 벗어나서 혼의 정신적 문명성으로 개화한 세계종교의 의의와 한계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잘 보여주는 한편, 세계종교가 선교의 미명 아래 종교제국주의의 팽창과 지배를 노출하고 다종교 상황의 종교시장에서 격렬한 상업적 경쟁의 문제점을 드러낸다는 문제점을 적절하게 비평한 것이다. 변찬린은 이러한 종교사적 통찰에 따라 세계종교들로 분열된 낡은 기성종교의 통일과 조화를 모색하는 것을 새종교의 과제로 제시하였으나, 낡은 기성종교들은 그러한 과제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판 밖에서, 맥줄 밖에서 홀연히 출현하여야 하는데,” 실제로 한국 근대 자생신종교의 창교자들이 그러한 과제를 수행하였다고 평가하였다.

 

그리하여 수운(水雲)과 증산(甑山)과 나철(羅喆)과 박중빈(朴重彬)과 김일부(金一夫)의 출현유불선(儒佛仙)의 종합을 시도하고 초극하는 새종교를 모색하면서 위대한 새 시대인 후천 하늘을 개명하려고 한 위대한 혼()들의 출생이며, 이들 중에서도 증산은 정신적 조산(造山)의 가장 높은 영봉(靈峯)을 분출시킨 혼으로서 한국 종교사의 거룡(巨龍)이었고, 새종교를 모색하는 후학들에게 높고 깊은 비의(秘義)를 계시해 준 종교적인 천재(天才)였다고 칭송하였다.

 

여기서 한국 근대 자생신종교들이 모색한 새종교, 미개한 동물성을 벗어나서 보편적 정신성 혹은 혼의 문명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풍토와 민족성의 특수성을 신성불가침의 호교론으로 변질시키면서 독선과 아집의 자기변호와 타종교 배척의 모순을 지닌 낡은 세계종교의 한계를 유불선으로 대표되는 기성 종교들의 종합과 통일과 초극이었다. 증산을 가장 높이 평가한 것은 이러한 과제를 의식적이고 체계적으로 실현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전혀 새로운 판 밖에서, 맥줄 밖에서 홀연히 출현하여야 한다는 인식과 동양 종교의 대각적 전통과 동방 약소국가의 고통받는 한국 민족이라는 맥락이 결합하여 후천개벽(後天開闢)’해원상생(解冤相生)’의 새종교의 가능성을 발현시켰던 것으로 보았다.

 

▲ 한국 근대 자생신종교들이 모색한 ‘새종교’는독선과 아집의 자기변호와 타종교 배척의 모순을 지닌 낡은 세계종교의 한계를 유불선으로 대표되는 기성 종교들의 종합과 통일과 초극이었다. 증산을 가장 높이 평가한 것은 이러한 과제를 의식적이고 체계적으로 실현하였기 때문이다. 한  국학중앙연구원 사진

 

2. 종말과 후천개벽의 상호텍스트적 해석과 신인합발의 종교관

 

그러나 변찬린은 신흥종교와 새종교를 엄밀하게 구분하였으며, 후천개벽이나 해원상생 등의 새종교에 대해서는 상당히 높게 평가하면서도, 현실적 생사와 이익에 매몰되는 신흥종교의 현실적 양상에 대해서는 거센 비판을 가했다.

 

예컨대, 마태복음 2436, 2442~43, 2513절에 따라 종말의 날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인식아래 시한부 종말론, 정감록, 노스트라다무스, 소강절 등처럼 특정한 날을 예견하는 양상을 미신이나 혹세무민으로 보고 비판하였다. 특히 선천이 지나가고 후천이 개벽되는 날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은 일반 비밀이자 천기이기 때문인데, 이러한 혹세무민의 미신적 양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을 이원론적 시공관념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였다.

 

先天後天二元論的 思考方式視空觀念으로 이해하면 잘못이다. 선천과 후천은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타락한 세상, 無名迷妄이 덮인 세상이 선천의 낡은 하늘이었고, 인류가 구원받아 지혜 속에 모두가 聖人이 되어 사는 것이 후천인데, 이런 뜻을 모르고 機械論的으로 64,800년이 선천이고, 64,800년이 후천이 된다는 運數說迷信인 것이다.

 

변찬린은 소강절의 원회운세(元會運世)의 이론에 따라 126,900년을 우주의 1년으로 계산하면서 그것을 선천과 후천으로 반분하고 우주가 생장염장(生長斂藏)을 반복하고 있다고 보는 관점을 미신(迷信)으로 규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인(聖人)의 예언은 깊은 기도와 수도를 통해 하나님의 성령이 강림하여 해답을 계시해서 백성들을 구원하는 방법으로서 광제창생(廣濟蒼生)하는 보편적인 예언이므로, 정감록이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혹은 기독교의 시한부 종말론처럼 무지몽매한 민간신앙으로 전승되거나 광신(狂信)하는 소수집단만의 구원을 위한 자의적 혹세무민(惑世誣民)과는 다르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종말 혹은 개벽을 소수에 국한된 구원을 위해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제한하거나 기계론적으로 계산이 가능한 자연의 반복적 순환 리듬으로 보는 것을 혹세무민의 미신으로 보고, 경전에 나오는 성인의 예언은 인간의 깊은 기도와 수도가 하나님의 성령 강림과 만나면서 이루어지는 신인합발’(神人合發)에 의해 모든 사람에게 열린 광제창생의 보편적 구원론으로 해석할 수 있다.

 

변찬린은 한국 근대 민족종교의 후천개벽(後天開闢)을 기독교 성서의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종말로 연결하여 해석하였다. 그는 상호텍스트적 관점에서 요한계시록 211절에 나오는 표현에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는 상황을 낡은 선천(先天)의 천지(天地)가 지나가고 후천의 개벽이 이루어지는 것과 합치시켜 해석하였다. 또한 이런 해석의 토대 위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후천 개벽을 위해 개벽쟁이로 자처한 증산이 천지공사(天地公事)라는 만고의 기행(奇行)’을 한 것을 선천의 모든 것을 해원하고 후천선경을 개명하려는 종교적 도행(道行)으로 보면서 증산교의 후학들 중 일부 소인배들이 그것을 시한부 말세론으로 논하면서 미신화하는 종교 노름을 비판하였다. 나아가 주역과 정역(正易)의 이치도 모르면서 함부로 도수(度數)를 짚는 어리석은 행동에서 벗어나서후천개벽의 올바른 사상적 이해를 통해 증산교를 고등종교로 고양시켜야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변찬린은 증산의 원시반본을 개인을 기복적 욕망으로 미혹하는 미신 혹은 혹세무민의 원시적 샤머니즘적 무맥(巫脈)의 재등장이 아니라 새 차원의 성()의 경지를 제시하는 모태로 설명하고, 천지공사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무격(巫覡)적 요소를 곁들여서 현상계와 신계를 매개하여 우주적 차원의 질서를 개편하여 지상성경(地上聖境)을 개명(開明)하는 역사였다고 평가하였다.

 

다만 변찬린에게 중요한 기준은 영생을 드러내는 대도인가, 아니면 생사에 얽매이는 종교인가였다. 이는 변찬린의 사상에서 평생 일관된 종교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기준에 따라 변찬린은 기독교 성서 텍스트에 충실하면서도 그것을 해석하는 관점이 한국의 독자적 특징을 잘 반영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사상가로서 정역(正易), 동학(東學), 대종교(大倧敎), 원불교(圓佛敎) 등 근대 한국에서 유교, 선도, 불교를 회통하고 재전유한 자생 신종교들을 기독교 주류의 배타주의적 관점이나 포용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풍류도를 근간으로 새롭게 구축한 선도의 관점에서 주체적으로 회통하였다. 그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후천개벽과 연계하여, 근대 한국의 자생 신종교들을 새로운 종교질서가 드러나는 후천세계의 새로운 종교로서 높게 평가하면서 기존의 기독교, 유교, 불교, 도교 등을 넘어서는 새로운 종교적 가치를 전개하면서 한국종교들의 정통 도맥인 선맥(仙脈)의 관점에서 대도(大道)의 정맥(正脈)을 계승한 것으로 새롭게 재해석하였다.

 

변찬린은 증산이 스스로 대무(大巫)가 되어 해원신(解冤神)으로 자처하면서 선천의 원한을 해원하여 후천의 새 하늘을 개천하는 개벽의 혁명적 종교사상을 칭송하였다. 특히 증산의 신관이 기독교처럼 초월과 내재의 유일신관도 아니고, 브라만같은 이신론도 아니며, 신령계와 인간계가 상호영향을 주고받는 신인동형적 신관임을 해명하였으며, 또한 이런 관점 아래 기독교같은 유일신이 아닌 지도적 일신으로서의 상제관을 증산이 천명하였음을 주장하였다.

 

특히 증산의 천지공사에 대해서는 인간계에 천하대란이 발생한 까닭이 신명계의 혼란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러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아집과 독선과 편견에 사로잡힌 기성 종교들을 신봉하다가 화천한 영들로 인해 혼란과 반목에 빠진 신명계의 해원(解冤)을 통해 영계의 종교적 통일을 이룩하고 그에 따라 후천선계가 개벽하여 지상의 정화와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 사상의 반영으로 풀이하였다. 변찬린은 천지공사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선후천 교역의 대전환기에 발생하는 재액을 면하기 위한 액운공사의 해원굿, 지방신들의 분쟁을 해원하는 세운공사, 분열된 선천의 종교들을 종합 통일하기 위한 교운공사, 무당식 푸닥거리를 통해 원귀를 위무하고 고차원적 도덕 질서를 확립하여 상극의 관계를 상생의 관계로 전화시키는 신명공사를 통해 후천도통의 기반을 닦는 등의 천지공사가 진행되었음을 설명하였다.

 

아울러 신인동형론의 관점에서 신령계와 인간계가 상호영향을 맺고 한을 풀어 후천개벽을 열고 해원상생을 하는 인존(人尊)시대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진행하였다. 신인동형적 신관과 신인합발(神人合發)의 구원론은 후천개벽의 새 하늘 새 땅 관념으로 구체화된다. 변찬린의 후천개벽 이해에 의하면, 선천에서는 구천의 초월적 하늘에 있던 옥황상제가 죄와 타락의 땅에 속한 인간의 예배를 받으면서 신명계와 인간계가 분리되었으나, 후천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하느님이 인간과 함께 땅에서 사는 신인동거의 선경이 전개된다. 선천(先天)은 구천(九天)의 하늘이었다. 옥황상제(玉皇上帝)는 구천에서 죄와 타락 속에 헤매는 인간들의 예배를 받았지만 후천(後天)의 하늘은 땅, 곧 십지(十地)가 선경(仙境)이 되므로 하느님도 후천에서는 인간과 함께 땅 위에서 살게 된다.

 

변찬린은 후천개벽(後天開闢)지구개벽과 그에 앞선 인간심성의 개벽으로 이해하였으며, 요한계시록 213~4절에서 서술하는 종말을 하느님이 인간 속에 거하고 인간이 하느님 속에 거하여 신인일체(神人一體), 신인합발(神人合發)하는 신비롭고 거룩한 시대가 개벽되어 오고 있는 역사적 대전환기에 약속된 후천선경(後天仙境)으로 설명함으로써 기독교와 증산사상을 비롯한 민족종교들을 상호 회통시켰다. 나아가 마음의 무명(無明)이 사라지고 진리의 태양(太陽)이 돋아 오르기 전에 떠오르는 샛별”, “낡은 종교의 어둠이 물러가고 새종교의 밝음이 올 때 잠시 마음에 떠오르는 샛별이 정신적 개벽으로 준비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준비는 증산사상 속에서 인존(人尊)사상과 연계될 수 있다. 증산사상 속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천존(天尊)과 지존(地尊)을 넘어 서서 인존의 시대로 표현된다.

 

천존과 지존보다 인존이 크니 이제는 인존시대라. 마음을 부지런히 하라. 옛적부터 상통천문(上通天文)과 하달지리(下達地理)는 있었으나 중찰인의(中察人義)는 없었나니 이제 나오리라.

 

변찬린은 현무경(玄武經)과 대순전경을 인용하면서 증산사상에 접근하였는데, 인용하고 설명한 대목과 내용이 모두 철저하게 풍류도(風流道) 혹은 선()의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증산을 옥추경(玉樞經)의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과 연계된 구천상제로 보는 대순진리회의 신관이 아니라 증산을 옥황상제로 인식했던 보천교 등을 비롯한 친자 종도 계열의 종단들의 신관을 증산사상으로 보았다. 이 점은 변찬린의 증산사상 이해에서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한편 현무경은 1909(己酉)년 정월 1일에 강증산이 직접 집필한 유일한 경전이다.

 

▲ 현무경은 1909년 증산교 창시자 강일순이 증산교의 중심 사상을 상징적으로 필사한 증산교서이다. 16개의 부(符)와 1,110자의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진

 

대순전경을 비롯한 다양한 경전들이 강증산을 따르는 친자 종도들이 만든 증산계 교파들이 만든 것임에 비해 현무경은 강증산이 직접 만든 경전으로, 16개의 부()1,110자의 글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내용은 유불선(儒佛仙) 등으로부터 비롯된 사상의 압축적인 응축과 재전유, 상징적 부적과 그림의 구성, 의례적 연행을 위한 수행적 주문과 축문의 제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종교 경전들이 일반적으로 교조의 언행과 가르침을 담고 있는 서술형의 산문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것과는 분명하게 대비되는 것으로서, 인간이 집필하는 인서(人書)가 아니라 천신들이 직접 계시하여 이해하기 힘든 문자, 부적, 그림, 주문 등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천서(天書)의 특징을 갖는 도교 경전의 특성과 상통한다. 이러한 특성은 중국의 초기 도교가 고대 도앙의 신도(神道) 혹은 선도(仙道)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대 신도/선도의 천서적 전통을 근대 한국 자생신종교가 새롭게 재전유한 양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삼국시대 이후의 한국불교와 조선시대 한국유교가 ’()’()의 문화적 표현방식으로 압축하여 회통하거나 조화시키는 양상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증산도 독창적으로 부적이나 짧은 운문투의 잠언 형식으로 그러한 양상을 보여주었는데, 여기서도 천지신명과 인간역사가 연동되는 신인합발의 양상이 잘 나타난다. 예컨대, 천지의 기운과 인간의 종교적 정신문명을 12포태법으로 연계한 내용은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다음 문장들은 천지의 신명계와 현실의 인간계가 대우주(macrocosmos)와 소우주(microcosmos)가 상호 연관하여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일종의 상관적 사유(correlative thinking)를 극명하게 선보이고 있다.

 

천지(天地)의 작용[]은 포태(胞胎) 양생(養生) 욕대(浴帶) 관왕(冠旺) 쇠병(衰病) 사장(死葬)일 뿐이다.

 

본래 포(), (), (), (), (), (), (), (), (), (), (), ()은 천지의 작용으로써 천지 만물의 생성과 소멸의 리듬이다. 12포태법은 본래 고대 중근동으로부터 시작되어 인도, 티벳 등을 거쳐 중국에도 수용되었던 점성술(astrology)에서 특정한 별이 지닌 역량이 작동하는 원리였으나, 중국에서는 인간이 잉태되고 태어나는 생명의 시작으로부터 자라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다가 병들고 죽어서 땅에 묻히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12단계로 생사의 과정을 세분한 것으로서, ()나라의 소길(簫吉)의 오행대의(五行大義)에서 체계화되었는데, 사주명리학과 풍수지리 등을 중심으로 하는 술법(術法)에서 활용되었던 것이다. 증산은 조선 팔도를 유력하면서 술사(術士)로서의 면모를 보일 때 사용했던 술법을 천지와 인간을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천지의 작용 법칙으로 재전유했다.

 

受天地之虛無 仙之胞胎

受天地之寂滅 佛之養生

受天地之以詔 儒之浴帶

冠旺

兜率 虛無寂滅以詔

 

천지(天地)의 허무(虛無)를 받아 선도(仙道)가 포태(胞胎)하고

천지의 적멸(寂滅)을 받아 불교가 양생(養生)하고

천지의 이조(以詔)를 받아 유교가 욕대(浴帶)하니

관왕(冠旺)

허무, 적멸, 이조를 도솔(兜率)한다.

 

위 인용문에서 천지(天地)의 허무(虛無), 천지의 적멸(寂滅), 천지의 이조(以詔) 등은 각각 선도, 불교, 유교의 삼교(三敎)는 포태(胞胎), 양생(養生), 욕대(浴帶)로 연계되고, 유불선 삼교를 통합하는 증산의 종교는 천지의 허무와 적멸과 이조를 아우르는 도솔(兜率)로서 포태, 양생, 욕대를 완성하는 관왕(冠旺)의 양상을 드러낸다. 12포태법으로 구현되는 천지의 작용 중에서 쇠병(衰病), 사장(死葬)은 제외되었다. 왜냐하면 죽음의 종교가 아니라 영생의 대도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변찬린은 특히 도솔(兜率)’을 선의 대도로 회귀하는 원시반본을 위한 통합종교의 양상으로 해석했다. 이와 연관하여 변찬린이 강증산의 언행 중에서 직접 인용하지 않은 부분을 연결시켜 고려할 필요가 있다. 강증산은 공사의 일환으로 직접 상징적이고 수행적인 방식으로 佛之形體 仙之造化 儒之凡節라는 글을 쓰고 불사르는 소지(燒紙)를 하거나 종도들에게 주문처럼 외우도록 시켰다. 따라서 천지의 작용과 인간의 종교 문명은 상호 합발한다고 할 수 있다. 수운이나 증산을 비롯한 근대 한국 민족종교 창시자들의 도술 혹은 술법 사용에 대해서 변찬린은 샤머니즘의 술법을 재전유한 것으로 이해하면서도, 무맥과 선맥을 비교하면서 증산사상이나 민족종교가 지닌 왕성한 무()의 식성(食性)에서 넘어서서 온전한 선맥의 대도를 지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류영모나 함석헌처럼 엘리트적 지향의 근대 한국 종교사상가들과는 달리 대중적 지향의 민족종교에 주목한 변찬린의 독특한 안목이 부각되는 대목이다. 다만 변찬린은 무맥의 무교성이 선맥의 풍류성으로 새롭게 승화되어야 하며, 그러한 승화를 몸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증산사상을 새종교의 대표적 사례로 칭송했다.

  

 

한밝학의 관점에서 선맥과 풍류도 연구에 천착해 온 이호재는 선맥의 풍류성과 무맥의 무교성을 표2와 같이 간명하게 비교한 바가 있다. 이를 통해 풍류도의 선맥은 습합론이 아닌 포월론이며, 기능신적 신령들을 섬기는 다신론이 아닌 일원적 지고신론을 지향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증산사상은 선맥의 풍류성과 함께 무맥의 무교설을 겸하고 있다. 예컨대, 증산은 주문 수행을 통해 대중의 기복적 열망을 강력한 종교의 동력으로 이끌었다. 실제로 동학의 성경신(誠敬信) 수행이 수명을 상대적으로 강조하는 반면 증산은 전통적 선도에서 강조했던 장수의 수명 성경신보다 기복의 복록 성경신을 더욱 중시했다는 점에서 동학보다 훨씬 무맥의 엑스타시스와 기복양재적 동기를 강화하였다. 그러면서도 신인합발사상과 더불어 후천선경의 도통(道通)의 가능성을 함께 역설한다는 점에서 동학과 상통한다. 따라서 증산사상과 근대 한국의 민족종교는 무맥의 무교성의 토대 위에서 선맥의 풍류성을 지향하는 혼의 종교로 볼 수 있다.  <박종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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