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 집중되는 세계불교, 한목소리로 외치자고 호소
종횡무진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58)
전통적으로 붓다는 기원전 563년 네팔 룸비니에서 바이사키 푸르니마(두 번째 달, 보름 날)에 탄생했다고 믿어진다. 싯다르타로서 그는 기원전 534년 29세의 나이로 가족을 버리고 진리를 찾아서 구도적(求道的)인 여행을 떠나서 결국에는 사원에 들어가서 명상수행을 했다. 가야의 우루벨라에서 6년 동안 고행을 수행한 후, 그 수행이 자신에게 해탈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 수행을 포기했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의 소위 ‘고귀한 팔정도’를 발견하고 실천하여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렀다. 즉, 정욕(라가), 증오(드베샤) 및 미혹(모하)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가 된 것이다.
우루벨라의 전정각산(前正覺山)에서 붓다는 초기 고행에서 동료였던 다섯 사람에 의해 버림을 받았다. 그들이 본 것은 싯다르타는 평범한 사람뿐이었다. 왕자로서는 위대했지만, 수행자로서는 너무나 연약하게 보였던 것이다. 왕자였던 싯다르타 고오타마는 고행자로서 탁발을 해야 했고, 금욕을 실천하면서 인내해야 했다.
싯다르타 고오타마는 무려 6년간의 고행과 명상을 했지만, 진전이 없었다. 싯다르타 고오타마는 니련선하의 강물에 몸을 씻고 마음을 가다듬어 강둑 근처에 있는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정좌하고 명상에 집중했다.
드디어 7일 만에 정각(正覺)을 성취한 것이다. 그리고 옛 동료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만나자 "고행은 마음을 혼란스럽게 할 뿐입니다. 고행에 따른 탈진과 정신 혼미 속에서 사람은 더 이상 삶의 평범한 일을 이해할 수 없고, 더욱이 저 너머에 있는 진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는 사치나 금욕주의의 극단을 포기하고 중도를 발견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중도(中道)에 의한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선포한 것이다. 다섯 명의 동료 도반들은 이 말을 듣고 부처님의 첫 제자가 되었다.
고오타마의 제자들은 힌두 달력에 따라 바이샤카(4~5월) 달의 보름달 동안 이곳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장소는 보드가야(Bodh Gaya 覺身)로, 깨달음의 날은 붓다 푸르니마(Buddha Purnima)로, 나무는 보리수(Bodhi Tree)로 알려지게 되었다.
보드가야의 역사는 많은 비문과 순례 기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5세기의 중국의 인도 구법순례자 법현과 7세기의 현장법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지역은 13세기 투르크 군대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 수 세기 동안 불교 문명의 중심지였다. 보드가야라는 지명은 18세기까지 사용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그곳은 우루벨라(Uruvela), 삼보디(Sambodhi 正覺)라고 불렀다. 아소카 대왕의 주요 바위 칙령 No.8의 ‘완전한 깨달음‘의 내용이 새겨져 있는 바즈라사나(Vajrasana 금강보좌)로 알려졌다. 보드가야의 사원은 보디만다 비하라 라고 부르다가 지금은 마하보디 사원이라고 불리고 있다.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의 기간 동안 보드가야는 지역 관리를 책임지는 보드가야의 피티파티(Pithipatis)로 알려진 지역 족장들의 통제를 받았다. 그들의 통치자 중 한 명은 마하보디 사원의 보호 관리 유지를 위하여 스리랑카 승려들이 불교적인 의식을 집전하고 종교적 수행을 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
보드가야는 비하르 주의 주도(州都)인 파트나에서 약 1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보드가야의 핵심은 금강보좌와 보리수이다. 이 보리수는 원래 스리랑카에 있는 스리마하 보디 나무의 묘목이다. 원래의 보디 나무의 손자뻘이 된 묘목이다. 원래 보리수는 이슬람 군대에 의하여 잘려나갔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지 약 200년 후인 기원전 250년경, 아소카 황제는 보드가야를 방문하여 이곳 성지에 수도원과 사당을 세웠다.
지난 2024년 1월 17일 18일 양일간 뉴델리 더 아속 호텔에서 제12차 아시아불교평화회의가 열렸다. 17개국에서 온 3백여 불교지도자들이 평화와 불교의 한 목소리를 주제로 대회를 개최했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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